귀촌 11

사과가 빨갛다고 맛있는 것은 아니다.

추석이 다가온다. 과일, 그 중에서도 사과는 가장 일상적인 추석선물의 하나다. 백화점에서 선물용으로 파는 사과들은 하나 같이 빨갛고 크다. 따라서 값도 비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사과들은 보기에 먹음직하면 맛도 좋다는 속설을 깨뜨린다. 이 사과들은 애초에 맛있는 사과를 생산해내기 위해 재배된 사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과 특유의 향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냥 보기에만 좋은 사과일 뿐이다. 각 지역 농협에서 사과를 수매할 때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색깔과 크기다. 겉모양만 좋으면 맛과는 상관없이 높은 등급을 받고 높은 가격을 받는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굳이 사과 맛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맛있는 사과보다는 보기 좋은 사과를 키워내야 더 소득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나무 ..

혼술

집에서 혼자 술 마신다는 사람 평생 이해 못하고 살다가 시골에 내려오고 난 후에는 혼술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시골에서 밖에 나가 술을 마신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성가신 일이다. 우선은 마땅한 술집 찾기가 어렵다. 혹시 있더라도 거리가 좀 있으면 오가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여기저기 들리느라 시간 오래 걸리고 낮에도 뜨문뜨문 다니는 버스는 생각할 수도 없고 술 한 잔 마시자고 매번 몇 만원씩 왕복 택시비를 써야하는 것도 마뜩치 않다. 대리운전 부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친구 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 날이면 그 집에서 자고 와야 한다. 그렇지만 민폐도 싫고 남의 집에 자는 것도 불편하다. 그래서 친구가 술 마시자고 불러도 자꾸 핑계대고 피할 궁리만 하게 된다. 시골에 내려올 때 매일 친구나 이웃과 어울려 ..

의미 없는 요일

시골에 내려오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 한편에 이런 그림을 그리면서 내려왔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사는 즐거움과 그 속에서의 한가하고 여유로운 삶. 때때로 먼 도시의 친구가 찾아와 함께 즐기는 꿈도 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는 때부터 그 꿈들은 헛된 망상이 된다. 직장에서는 업무마다 완료라는 개념이 있지만 농사는 수확할 때까지 ‘끝’이라는 개념이 없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농사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작물과 농법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하루 더 돌보고 안 한 것의 차이는 수확 때 나타나고 그 사실을 경험 있는 농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하루도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다. 매일 같이 일을 해도 늘 못한 일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농사인 듯하다. 무슨 날이라고..

친구네 과수원

작년에는 사과나무에 꽃이 많이 피고 열매도 많이 달려 풍년을 예상했는데 장마철 오랜 비로 사과가 제대로 익질 못했다. 수확한 사과도 제 맛이 나지 않았다. 농사를 망친 해다. 금년에는 시작부터 꽃이 적게 열리더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꽃이 피는 시기에 냉해까지 입어 그야말로 사과가 듬성듬성 달렸다. 농촌생활 10여년에 이미 농부가 돼버린 친구는 그것만이라도 잘 자라기를 바라며 푹푹 찌는 날씨에도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농촌에 워낙 일손이 모자라다보니 또 불려갔다. 시나노스위트라는 품종의 사과다. 아오리와 같은 계통의 품종이라 하는데, 8월 하순부터 수확하는 아오리는 조생종이고 이 품종은 조금 늦게 9월 초에 수확하는 중생종이다. 관심이 별로 없어서 3년을 과수원에 드나들면서도 이제야 겨우 머릿속에 정리..

시골에 오는 봄

겨우내 메말랐던 가지에 물이 오른다. 겨울을 견뎌낸 생명력이 딱딱한 껍질을 뚫고 봉오리를 열기 시작한다. 봄비를 맞은 살구나무는 곧 꽃을 피울 기세다. 멀리 뵈는 산 정상에는 봄비와 아지랑이가 섞여 한 폭의 산수화다. 불과 일주일이면 온 주변이 연둣빛으로 물들을 것이다. 먼저 연둣빛으로 치장한 귀룽나무는 머지 않아 또 흰색 꽃으로 하얗게 물들 것이다. 언제나 봄은 이렇듯 소리 없이 온다.

백로도 고단하다.

백로는 그 몸의 흰 빛과 고고해 보이는 자태로 인하여 우아하고 고상한 새로 인식되어 왔다. 물속에 발을 담그고 미동도 없이 서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세상의 모든 명리를 잊은 듯 너무도 초연해 보여 매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 지난 삶을 돌아보게도 만든다. 그런데 오래 지켜보니 백로의 삶 또한 우리 인간사와 하나도 다름이 없다. 그 고상하고도 초연해 보이는 모습이 사실은 먹이를 노리는 백로의 삶의 현장이었다. 물속에 일렬로 줄지어 선 이 모습이 신기해 보이지만 백로들은 흐르는 물의 길목에 각기 자리를 잡고 지켜 서서 물속의 고기를 노리고 있는 중이다. 고상해 보이는 이 백로들끼리는 영역 싸움도 한다. 먼저 자리를 잡았지만 먹이가 없어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새가 뒤늦게 오면 그 새가 멀리 도망갈 때까지 ..

혼자서도 잘 놀 줄 알아야 한다.

처음 시골에 내려오면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발길이 뜸해지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 찾아온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문득 사람이 그리워지고 외로움이 찾아오면서 혼자만 세상에서 외톨이가 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언제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던 때가 그립고 사람 사는 것처럼 떠들썩한 도시 풍경이 자꾸 떠오른다. 그렇게 좋다고 생각되던 한적한 시골 풍경이 마냥 쓸쓸하게만 느껴지기 시작한다. 심해지면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 그래서 살던 도시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사업도 양다리 걸쳐서 성공하는 예가 드물듯, 시골살이도 도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적응하기 힘들다. 사실 시골은 도시에 비해 뭐든지 불편한 것이 많다. 그런 시골에 정을 붙이고..

시골로 내려온 이유를 잊지 말기

시골에 내려오게 되는 결심의 가장 큰 이유가 자연과 여유로운 삶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으면서도 사람들은 자주 그것을 잊는다. 돈도 벌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돈을 벌려면 시골보다 도시가 낫다. 시골은 쓰고 먹고 즐기러 오는 곳이다. 그래야 자신도 행복하고 지방도 산다. 居之平 安爲福 萬事分定要知足 지내는 것이 평안하면 그것이 곧 행복, 만사의 나눔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만족할 줄 알아야 하네. 粗衣布履山水間 放浪形骸無拘束 허름한 옷 입고 면포 신발 신은 채 자연 속에 살지만 떠도는 내 몸은 자유로워 걸릴 것 없네. 好展卷 愛種竹 花木數株喜淸目 글 읽기 좋아하고 대나무 심는 것 즐겨하여 꽃과 나무 몇 그루 눈을 맑게 해주니 기쁘도다. 滌煩襟 遠塵俗 靜裏蒲團功更熟 번거로운 생각 씻어버리고 티끌세상 멀리..

서두름이 실수를 낳는다.

시골에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흔히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땅부터 사는 것이다. 미지의 거처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 때 ‘내 땅’이 있다는 것은 많은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땅을 사두면 땅값이 오를 것이며 농사를 지어 소득도 올릴 수 있다는 기대심리가 있고, 남의 집에 살 때의 불편함과 경제적 부담도 고려한 것이니 일견 합리적 결정처럼 보인다. 이 글을 쓰는 자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지인에게 땅을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그러마고 대답은 하면서도 너무 서두르지 말고 내려와서 살며 천천히 사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지인과 부동산을 통하여 부지런히 여러 곳을 둘러보고 거의 구입 직전까지도 갔었다. 그러다 일이 틀어져서 결국 땅을 사지 못한 채 셋집을 얻어 내려왔다.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