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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봄비’라고 하면 무언가 낭만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지만, 농사짓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단비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듯하다. 불과 얼마전만해도 봄에 가뭄이 들면 그해 농사 걱정을 하는 뉴스들로 떠들썩하곤 했었다. 이제 그런 걱정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그런 소식이 더 이상 뉴스의 가치가 없어진 것인지, 근래에 들어서는 봄 가뭄이 들어도 걱정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관개시설이 미비해 하늘만 쳐다보던 그 옛날은 어떠했을까?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가 지은 시 가운데 라는 오언율시가 있다. ‘봄밤에 내린 기쁜 비’라는 뜻이다.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 봄이 되니 이내 내리네. 隨風潛入夜 바람 따라 몰래 밤에 찾아 들어와 潤物細無聲 만물을 적시네, 가만..

우리 옛 그림 2021.03.20

목민심서 17 - 아전들이 말하는 금기(禁忌)에 현혹되지 말라.

●부임(赴任) 제4조 계행(啓行) 3 관아에 귀신과 요괴가 있다고 하거나 아전들이 금기(禁忌)를 고하더라도 마땅히 아울러 구애받지 말고 현혹된 습속들을 진정시켜야 한다. (廨有鬼怪 吏告拘忌 宜竝勿拘 以鎭煽動之俗) ▶계행(啓行) : 부임하는 행차 동한(東漢) 때에 왕돈(王忳)이 미현(郿縣)의 수령에 임명받고 부임하여 시정(漦亭)에 이르니, 정장(亭長)이, “정(亭)에는 귀신이 있어 지나가는 나그네를 자주 죽이니 잘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돈이, “인(仁)은 흉사(凶邪)를 이기고 덕(德)은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치니 어찌 귀신을 피하랴.” 하고, 바로 정(亭)에 들어가 머물러 잤다. 밤중에 들으니 여자가 억울함을 말하되, 정장에게 죽음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왕돈이 이튿날 아침 유격(游檄)을 불러..

목민심서 2021.03.18

목민심서 14 -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하지 않는 경우

●부임(赴任) 제3조 사조(辭朝) 6. 이웃 고을로 관직이 옮겨져 편도(便道)로 부임하게 되는 경우에는 사조(辭朝)하는 예(禮)가 없다. (移官隣州 便道赴任 則無辭朝之禮). ▶사조(辭朝) : 관직에 새로 임명된 관원이 부임하기에 앞서 임금에게 사은숙배하고 하직하는 일. ▶편도(便道) : 지름길. 편리(便利)한 길 이는 하직인사 없이 부임한다는 것이다. 단지 번거로운 폐단을 줄인다는 뜻이니, 날마다 살펴 지방관의 직능을 부여해준다는 옛 뜻은 아니다. ▶옛 뜻 : 《서경(書經)》에 순(舜)임금이 “이에 날마다 사악(四岳) · 군목(群牧)을 보시고 군후(群后)들에게 서옥(瑞玉)을 나누어주었다”라고 한 말에 근거한 것이다. 사악(四岳)은 사방의 제후(諸侯), 군목(群牧)은 9주(州)를 다스리는 목백(牧伯), 서..

목민심서 2021.03.12

목민심서 12 - 아전과 하인을 대할 때는 말을 많이 않는 것이 묘법이다.

●부임(赴任) 제3조 사조(辭朝) 4. 신영(新迎)하러 온 아전과 하인이 오면 그들을 접대함에 마땅히 장중하고 화평하고 간결하고 과묵하게 해야 할 것이다. (新迎吏隷 至其接之也 宜莊和簡默) ▶사조(辭朝) : 관직에 새로 임명된 관원이 부임하기에 앞서 임금에게 사은숙배하고 하직하는 일. 신영하러 온 수리(首吏)의 행낭(行囊) 속에는 으레 작은 책 한 권이 들어 있으니, 곧 《읍총기(邑總記)》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봉록의 쌀과 돈의 숫자와 농간하여 남는 것을 사취(私取)하는 방법이 각가지로 나열되어 있다. 수리가 와서 뵙는 날에 이를 꺼내어 바치면 수령이 받아 보아 흔연히 기쁜 빛을 띠고 조목조목 캐어물어서 그 묘리와 방법을 알아내는데, 이것은 천하의 큰 수치이다. 아전이 바치는 날에 마땅히 즉시 돌려주고 ..

목민심서 2021.03.10

목민심서 11 - 수령의 임명은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다.

●부임(赴任) 제3조 사조(辭朝) 3. 전관(銓官)에게 들러 하직 인사를 할 때에 감사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歷辭銓官 不可作感謝語) ▶사조(辭朝) : 관직에 새로 임명된 관원이 부임하기에 앞서 임금에게 사은숙배하고 하직하는 일. 전관(銓官)은 국가를 위하여 사람을 뽑아 썼으니 사은(私恩)을 끌어대서는 안 될 것이요, 수령은 자격에 따라 관직을 얻었으니 사은으로 마음속에 품어서는 안 된다. 한자리에서 상대하더라도 말이 주의(注擬)에 미쳐서는 안 될 것이니, 전관이 만약 스스로 그 말을 꺼내거든 다만, “명공(明公)이 변변치 못한 사람을 잘못 천거하셨습니다. 일을 그르쳐 훗날에 명공께 누를 끼칠까 매우 두렵습니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전관(銓官) :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딸려 문무관(文..

목민심서 2021.03.09

대한(大韓)의 신민이 어찌 원수 나라의 돈을 받겠는가.

채용신이 1910년 정읍 칠보면을 방문했을 때 만난 사람 중에는 춘우정(春雨亭) 김영상(金永相, 1836 ~ 1910)이라는 분도 있었다. 전라북도 정읍 북서쪽의 고부(古阜) 출생으로 태인(泰仁)에 거주하며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이 1910년 8월 29일 순종의 조서로서 공포된 후, 일제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 황실의 작위를 주고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주기도 했다. 매국 행위에 동참한 대신과 왕족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력인사에게도 회유 차원에서 돈이 뿌려졌다. 태인(泰仁)에 있던 김영상에게도 이 은사금이 배당되었다. 김영상은 집에 은사금을 준다는 사령서(辭令書)가 오자 “유자(儒者)로서 원수의 돈을 받겠느냐.”며 자손에게 사령서를 돌려..

우리 선조들 2021.02.05

시골에선 50대도 젊은이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사과 농사를 주로 하는 지역이다. 나무에 비료만 잘 주면 알아서 열릴 것이라는 농알못의 생각과는 달리 과수원에도 의외로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1월에 비료주기부터 시작해서 가지치기, 적과를 비롯하여 팔기 좋은 사과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사과를 수확하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일손이 필요하다. 처음 내려왔을 때만해도 그런 일들은 주로 지역민들이 했다. 하지만 불과 2, 3년 만에 이제는 거의 외국인으로 바뀌었다. 일손을 필요로 하는 시기가 서로 같다보니 그 마저도 미리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사람 부르기도 어렵다. 농사는 때를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되면 과수원 주인들의 얼굴은 사색이 된다. 농촌인구의 노령화는 어제 오늘 들은 얘기가 아니지만 실제로 시골에 살아보면 느끼는 ..

칠광도(七狂圖), 10현도(十賢圖)

1910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상실되자, 채용신은 익산의 금마에서 정읍 칠보로 향했다. 정읍 칠보는 1906년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던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는 곳이다. 채용신은 그곳에서 김직술(金直述)의 집에 머물렀다. 김직술은 최익현이 거병할 때 재정을 맡아 전라북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던 인물이다. 무성서원은 원래 신라시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을 모시던 사당과 인종 때 태인(泰仁)목사를 지낸 신잠(申潛)의 사당을 병합하여 숙종 22년인 1696년에 임금으로부터 ‘무성(武城)’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은 서원이다. 경기도 포천에서 지내던 최익현이 1906년 이곳까지 내려와 거병하게 된 것도 그가 최치원의 27대손이라는 인연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채용신은 이때에 무성..

우리 옛 그림 2021.02.03

병풍 32 - 종정도(鐘鼎圖)

종정도(鐘鼎圖)에서의 종정(鐘鼎)은 울리는 종과 음식을 삶는 솥[鼎]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고대 중국에서 제례 때 사용하던 금석(金石)붙이의 의례기(儀禮器)를 의미한다. 이러한 고대의 종정(鐘鼎)에는 공적을 송축하는 글이나 사물의 내력을 기록한 글 등이 새겨졌었는데 이를 명(銘)이라고 한다. 은(殷)ㆍ주(周) 시대의 종정의 명(銘)에 쓰인 글자는 고문, 주문(籒文), 대전(大篆)과 같은 한문 자체(字體)로 종정문자 혹은 종정고문(鍾鼎古文)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들 명문(銘文)은 동양 금석학(金石學)의 대상이었다. 종정도는 기명도(器皿圖) 또는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와 유사하게 고동기(古銅器)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기물의 형태만이 아닌 기물에 새겨진 문자도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진 그림이다...

우리 옛 병풍 2021.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