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12

허균 45 - 엄처사전(嚴處士傳)

‘전(傳)’은 한 인물의 일생 행적을 기록하는 한문문체이다.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편술할 때에 백이열전(伯夷列傳)을 비롯한 70여 편의 전(傳)을 남긴 이후에 역대의 사가들이 이를 계승하면서 정사(正史)의 문체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전(傳)은 문인들에게도 보급되어 정사(正史)에 수용되지 못한 처사(處士)나 은둔자의 드러나지 않은 덕행이나 본받을 만한 행실을 서술하는 방편으로도 활용되었다. 동시에 ‘전(傳)’에서 다루는 인물의 성격과 문장의 형태도 매우 다양해졌다. 허균은 홍길동전 외에도 자신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5편의 전을 남겼다. 이 글들은 홍길동전과는 달리 모두 한문으로 쓰인 것으로 허균이 40여세 즈음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처사전(..

우리 선조들 2021.11.24

허균 19 - 한정록(閑情錄) 한적(閒適) 2

● 낙성(洛城) 안팎 60~70리 사이의 모든 도관(道觀)과 불사(佛寺)와 고적지(古跡址)와 별장 가운데 천석(泉石)이나 화죽(花竹)이 있는 곳은 놀아보지 않은 데가 없고, 좋은 술과 거문고가 있는 인가(人家)는 들러보지 않은 데가 없고, 도서(圖書)와 가무(歌舞)가 있는 곳은 구경하지 않은 데가 없다. 낙천(洛川)의 수재(守宰)로부터 포의가(布衣家)에 이르기까지 연유(宴遊 :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놂)할 일로 부르는 자가 있으면 또한 때때로 찾아갔다. 매양 좋은 계절, 좋은 경치나 혹은 눈 내린 아침, 달뜨는 저녁에 호사자(好事者)들이 서로 찾아올 때면, 반드시 그들을 위해 먼저 술항아리를 꺼내 마시고 다음엔 시 상자[詩篋]를 열어 놓고 읊으며, 술이 이미 거나해지면 이내 거문고를 가져다가 궁성(宮聲)..

우리 선조들 2021.09.02

허균 18 - 한정록(閑情錄) 한적(閒適) 1

● ‘한(閒)’ 자의 자의(字義)에 대하여 어떤 이는 달[月]이 대문(大門) 안에 들이비치는 것이 바로 한(閒) 자라고 한다. 옛날에는 모두 문(門) 안에 일(日)을 넣은 간(間) 자와 같이 보아 왔지만, 그 음(音)만은 달리 쓰이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한가로움이란 저마다 얻기 어려운 것이다. 이를테면 두목지(杜牧之)의 시(詩)에, 不是閒人閒不得 한인(閒人)이 아니고야 한가로움을 얻을 수 없으니 願爲閒客此間行 이 몸이 한객(閒客) 되어 이 속에 놀고파라 하였다. 이에 오흥(吳興 : 지금의 복건성(福建省) 포성현(浦城縣))에 한정(閒亭)을 건립하였다. 나는 본시 한가로움을 무척 좋아하면서도 한가로운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여 시(詩)를 짓고 술[酒]을 마련하거나 꽃나무를 가꾸고 새[禽]들을 길들이는..

우리 선조들 2021.08.25

허균 17 - 한정록(閑情錄) 고일(高逸) 2

● 양적(陽翟)의 신군(辛君)은 선배들 가운데 어진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덕으로 벼슬을 얻었으나 은거(隱居)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는 소자용(蘇子容) 승상(丞相)의 처남(妻男)이고 이정(二程 :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선생의 외숙(外叔)이다. 당시 소 승상이 한창 성할 때여서 자주 그를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천(伊川 : 정이(程頤)) 선생이 원풍(元豐) 연간에 해마다 낙중(洛中)으로부터 와서 영창(潁昌)에 있는 한지국(韓持國 : 지국은 한유(韓維)의 자)을 방문했는데, 양적을 지날 때는 반드시 신군의 집에서 10여 일씩 머무르곤 하였다. 그의 집에는 7칸짜리 대옥(大屋)이 있었는데, 집 뒤에는 온통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피어 있어 평생토록 자락(自樂)하였다. 《와유록(臥遊錄)》 ●..

우리 선조들 2021.08.18

허균 14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2

● 사마덕조(司馬德操 : 덕조는 후한 사마휘(司馬徽)의 자)는 인륜(人倫)이 있는 사람이었다. 형주(荊州)에 있을 때 유표(劉表)가 혼암(昏暗)하여 반드시 착한 사람들을 해치게 될 것을 알아차리고서, 입을 다물고 다시는 논평을 하지 않았다. 이때 인물(人物)들을 놓고 사마덕조에게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초부터 인물들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번번이 좋다고만 말하므로, 그 아내가 간(諫)하기를,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바를 질문하면, 당신이 마땅히 분별해서 논해 주어야 하는데 모두 좋다고만 하니, 어찌 사람들이 당신에게 물어보게 된 본의이겠습니까?” 하니, 사마덕조가, “당신의 말 역시 좋은 말이오.” 하였다. ● 남군(南郡) 방사원(龐士元 : 사원은 촉한(蜀漢) 방통(龐統)의 자)이 사마덕조가 영천(穎川)에..

우리 선조들 2021.08.10

허균 13 - 한정록(閑情錄) 은둔(隱遁) 1

● 소부(巢父)는 요(堯) 시절의 은자(隱者)인데, 산 속에 살며 세속의 이욕(利慾)을 도모하지 않았다. 늙자 나무 위에 집을 만들어 거기에서 자므로 당시 사람들이 ‘소부’라고 했다. 요(堯)가 천하(天下)를 허유(許由)에게 양여(讓與)하려 할 때, 허유가 소부에게 가서 그 말을 하자 소부가, “자네는 어찌하여 자네의 형체를 숨기지 않고 자네의 빛깔을 감추지 않는가?” 하며, 그의 가슴을 밀쳐 버리므로 허유가 서글픔을 주체하지 못하여, 청랭(淸冷)한 물가를 지나다가 귀를 씻고 눈을 씻으며 말하기를, “전일에 탐욕스러운 말을 들음으로써 나의 벗을 저버리게 되었도다.” 하고, 드디어 떠나 일생을 마치도록 서로 만나지 않았다. 《고사전(高士傳)》 ● 허유는 사람됨이 의리를 지키고 행신이 발라, 부정한 자리에는..

우리 선조들 2021.08.09

허균 12 - 한정록(閑情錄) 범례(凡例)

내가 경술년(庚戌年)에 병으로 세간사(世間事)를 사절(謝絶)하고 문을 닫고 객(客)을 만나지 않아 긴 해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보따리 속에서 마침 책 몇 권을 들춰내었는데, 바로 주난우(朱蘭嵎) 태사(太史)가 준 서일전(棲逸傳), 《옥호빙(玉壺氷)》, 《와유록(臥遊錄)》 3종이었다. 이것을 반복하여 펴 보면서 곧바로 이 세 책을 4문(門)으로 유집(類集)하여 『한정록(閒情錄)』이라 이름하였다. 그 유문(類門)의 첫째가 ‘은일(隱逸)’이요, 둘째가 ‘한적(閒適)’이요 셋째가 ‘퇴휴(退休)’요 넷째가 ‘청사(淸事)’였다. 내 손으로 직접 베껴 책상 위에 얹어 두고, 취미가 같은 벗들과 그것을 함께 보며 모두 참 좋다고 하였다. ▶경술년(庚戌年) : 광해군2년인 1610년 ▶주난우(朱蘭嵎) : 명..

우리 선조들 2021.08.04

허균 11 - 한정록(閑情錄) 서(序)

허균은 17세 때인 1585년 초시(初試)에, 그리고 21세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대과인 과거에 급제한 것은 26세 때인 1594년이었다. 29세 때인 1597년에 예문관 검열이 되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겸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총명함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1598년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 이어 1604년에는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1606년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

우리 선조들 2021.08.03

허균 7 - 유재론(遺才論)

유재론(遺才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다섯 번째 논(論)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과, 함께 하늘이 맡겨 준 직분을 다스릴 사람은 인재(人才)가 아니고서는 되지 않는다. 하늘이 인재를 태어나게 함은 본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인재를 태어나게 함에는 고귀한 집안의 태생이라 하여 그 성품을 풍부하게 해주지 않고,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라고 하여 그 품성을 인색하게 주지만은 않는다. 그런 때문에 옛날의 선철(先哲)들은 명확히 그런 줄을 알아서, 더러는 초야(草野)에서도 인재를 구했으며, 더러는 병사(兵士)의 대열에서 뽑아냈고, 더러는 패전하여 항복한 적장을 발탁하기도 하였다. 더러는 도둑 무리에서 고르며, 더러는 창고지기를 등용했었다. 그렇게 하여 임용한 사람마다 모두 임무를 맡기..

우리 선조들 2021.07.05

허균 5 - 관론(官論)

관론(官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세 번째 논(論)이다. 삼대(三代) 이후로 관직을 함부로 늘리고 관원(官員)이 많았던 것으로는 당(唐)나라보다 더한 나라는 없었다. 관직을 함부로 늘린다면 권한이 분산되어 지위가 높아지지 못하고, 관원이 많으면 녹(祿)만 허비되고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고서야 훌륭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씨(李氏)의 번창하지 못했음은 오로지 여기에 연유하였다. ▶이씨(李氏) : 이연(李淵)이 건국한 당나라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관제(官制)는 당(唐)나라를 본받았으나, 더욱 관직이 늘어났고 또 헛 비용이 들게 되어 있다. 중국처럼 큰 천하로서도 오히려 권한이 분산되고 녹의 비용이 드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하물며 궁벽한 조그마한 우리..

우리 선조들 2021.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