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도 아시아 1위 신뢰도는 꼴찌 105

허균 10 - 호민론(豪民論)

호민론(豪民論)은 성소부부고 제11권 문부(文部)의 여덟 번째 논(論)이다.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도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음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우리 선조들 2021.07.16

조중동은 왜 이 정권을 그렇게 까댈까?

과거 언론과 정부는 밀월기간이라는 암묵적 관행이 있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대략 6개월 정도는 여간해서는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싣지 않는다는 불문율 같은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정부는 출발 때부터 두들겨 맞았고, 아직도 매일같이 맞고 있다. 물론 그 타격감이 예전 같지는 않다. 조중동은 왜 이 정부를 패는 일에 선봉장이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저 조중동이 보수로 가장한 수구세력 또는 친일세력이라 서로 가치관이 안 맞아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 그러나 조중동은 원래 특별한 가치관이 있었던 신문들이 아니다. 조중동이 한 때는 자신들 입으로 정론지(正論紙)임을 주장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조중동을 비롯한 이 나라의 대다수 언론들은 늘 권력에 유착하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해왔던..

백가쟁명 2021.07.15

목민심서 59 - 아랫사람이 올리는 생일상을 물리쳐라.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14 수령의 생일에는 아전과 군교(軍校) 등 제청(諸廳)이 혹 성찬(盛饌)을 올리더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牧之生朝 吏校諸廳 或進殷饌 不可受也)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청렴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청심(淸心)은 그 가운데 2번째이다. 아전과 군교들이 바치는 성찬(盛饌)은 모두 백성들의 재력과 노력에서 나온 것이니, 계방(契房)의 돈을 거두기도 하고 보솔(保率)의 돈을 거두기도 하는데, 이것을 빙자하여 온갖 방법을 다해 가혹하게 거두어들인다. 어민들의 물고기를 빼앗고 민촌의 개를 때려잡으며, 밀가루와 기름은 절..

목민심서 2021.07.14

목민심서 58 - 일용품 구매 장부는 꼼꼼히 볼 필요가 없다.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13 무릇 일용 물품의 구매 장부는 자세히 볼 것이 아니니 끝에 서명을 빨리 해야 한다. (凡日用之簿 不宜注目 署尾如流)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청렴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청심(淸心)은 그 가운데 2번째이다. 학궁(學宮)과 여러 고(庫)의 하기(下記)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지만, 주리(廚吏)나 현사(縣司)의 하기(下記)는 절대로 자세히 보지 말고 속히 화압(花押) - 방언으로 수례(手例)라 한다. - 을 치는 것이 좋다. 비록 지나친 지출이 있더라도 절대로 깎아서는 안 된다. ▶학궁(學宮) : 성균관(成均館)..

목민심서 2021.07.10

진재봉래도권(眞宰逢萊圖卷)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목록에 작가도 명시되어있지 않은 채 그냥 ‘화첩(畵帖)’으로만 이름이 올라있는 화첩이 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공개한 자료에는 첩의 표지에 「진재봉래도권(眞宰逢萊圖卷)」이라 쓰여 있다. 이것으로만 보면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 ~ 1775)이 그린 금강산그림을 모은 화첩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화첩 표지에는 추사 김정희가 소장했었다는 의미의 ‘완당(阮堂)장(藏)’이라는 글씨까지 쓰여 있다. 박물관에서 아직 이 첩을 들여다볼만한 여가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 화첩이 김윤겸의 작품이라는 결론을 못 내려서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 화첩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다. 그래서 첩의 표지 글씨가 과연 김정희의 것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다. 화첩의 구성으로 보면 이 첩은..

우리 옛 그림 2021.07.08

조선의 기생 16 - 기생의 지아비

인조(仁祖) 대 이후로는 서울에 악가무를 전업으로 하는 장악원 여기(女妓)를 따로 두지 않았다. 소위 경기(京妓)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물론 내의원, 혜민서의 의녀(醫女)와 공조, 상의원의 침선비(針線婢)는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그들은 장악원 소속도 아니고 연향에 보조자로 동원될 뿐 악가무가 주업도 아니다. 그래서 궁중의 연향행사가 있으면 그때마다 각 지방에서 뽑아 올린 선상기(選上妓)들이 서울로 올라왔다가 궁궐 행사를 마치면 다시 자기 소속 고을로 돌아가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런 체제는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계속 유지되었고, 영조 대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도 “진연 때에, 여기 52명을 선상한다. 특별한 지시가 있으면 가감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서울에 따로 머물 곳이 없는 이들 선상기들이..

우리 옛 뿌리 2021.07.07

목민심서 57 - 이노(吏奴)들이 시장에서 부리는 농간을 예방하라

●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12 무릇 포목과 비단을 사들일 경우에 인첩(印帖)이 있어야 한다. (凡布帛貿入者 宜有印帖)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청렴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청심(淸心)은 그 가운데 2번째이다. ▶이노(吏奴) : 지방 관아에 딸린 아전(衙前)과 관노(官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읍마다 반드시 읍시(邑市)가 있는데, 물건을 사들이는 이노(吏奴)들이 관에서 사들인다는 것을 빙자하여 포백(布帛)을 강제로 헐값으로 사거나, 또는 내사(內舍)나 책방(册房)이 사사로이 사들이면서 몰래 그 값을 깎거나 하면 이노(吏奴)들이 그 모자라는 ..

목민심서 2021.07.06

정수영 해산첩(海山帖) 4

옥류동(玉流洞)은 외금강 구룡폭포로 올라가는 도중의 구간을 이르는데, 맑은 물이 구슬이 되어 흘러내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 50m 되는 옥류폭포와 넓이가 약 600㎡에 이르는 옥류담이 있다. 비봉폭(飛鳳瀑)은 옥류동의 연주담과 무봉폭포 사이에 있는 폭포로서 금강산 4대 폭포의 하나이다. 두 그림은 모두 외금강의 구룡폭포(九龍瀑布)를 그린 것이다. 오른쪽 그림에는 ‘웅덩이 옆에서 그렸으니 가까이서 그 세(勢)를 본 것’이라 했고, 왼쪽 그림에는 ‘폭포 동쪽 반석에 앉아 그 세(勢)를 마주 본 것’이라 적었다. 구룡폭포는 너비가 약 4m이고 높이는 약 74m로, 일명 중향폭포(衆香瀑布)라고도 한다. 설악산의 대승폭포(大勝瀑布), 개성 대흥산성(大興山城)의 박연폭포(朴淵瀑布)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우리 옛 그림 2021.07.04

정수영 해산첩(海山帖) 3

집선봉(集仙峯)은 외금강(外金剛) 안에 있는 기봉(奇峯)의 하나로 금강산(金剛山)에서도 특히 웅장(雄壯)한 산악미(山岳美)를 자랑하는 봉우리이다. 금강산에서도 제일 날카로운 봉우리로 유명하다. 봉우리에 서있는 바위기둥들의 모양이 마치도 신선들이 무리지어 서있는 것 같다 하여 집선봉(集仙峯)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집선봉의 봉우리는 전체가 하나의 통바위로 이루어져 나무 한 그루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정수영의 은 집선봉의 북쪽 산줄기를 그린 것이다. 정수영이 나름 최선을 다해 실제 모습과 가깝게 그리려 했겠지만, 지금 사진으로 보는 집선봉(集仙峯)은 정수영의 그림에서 갖게 되는 느낌과는 천양지차다. 우리가 자주 접할 수 없는 북한 화가들의 집선봉 그림들도 이채롭다. 정수영의 그림을 폄훼하려는 ..

우리 옛 그림 2021.06.30

한번 뿐인 삶.

기원전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관리로 굴원(屈原)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초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영리하였고 커서는 박학다식에다 언변까지 뛰어나, 젊은 나이에 일찍부터 높은 벼슬에 오르며 왕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좌절의 순간들이 찾아왔다. 왕의 관심이 멀어지기도 하고,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가 결국에는 멀리 추방까지 당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굴원은 점치는 관리인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게 의심되는 일이 있으니 원컨대 선생께서 결정을 내려주시오!” 그러자 정첨윤(鄭詹尹)은 점대를 바로잡고 거북 껍질을 깨끗이 털며 말했다. “그대에게 무엇을 일러드릴까요?” 굴원이 말했다. “나는 성실 근면하며 소박하게 충성해야 합니까? 아니면 세속에..

백가쟁명 2021.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