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기생 15

조선의 기생 23 - 청루(靑樓) 홍루(紅樓)

기방의 고객을 오입쟁이라 하는데, 강명관의 「조선풍속사」에는 이 오입쟁이들이 기방에 처음 나온 기생을 길들이는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한 사람이 좌중에 통할 말 있소.” “네, 무슨 말이요.” “처음 보는 계집 말 묻겠소.” 이렇게 운을 떼면 “같이 물읍시다.” 또는 잘 물으시오.“라고 한다. 이 말이 떨어지면 “이년아, 네가 명색이 무엇이냐?”라고 묻고, “기생이올시다.”라고 하면, “너 같은 기생은 처음 보았다. 이년아, 내려가 물이나 떠오너라.”하고 뺨을 약간 때린다. 이건 기생이 아니라 하인이 아니냐는 수작이다. 기생이 여전히 “기생이올시다.”라고 하면 “이년아, 죽어도 기생이야”라고 하고, 여기에 또 “기생이올시다.”라고 답하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네가 하- 기생이라 하니,..

우리 옛 뿌리 2021.09.03

조선의 기생 22 - 기방 풍속

조선 전기에는 기생의 거처를 창가(娼家)라고 불렀다. 그저 기생이 유숙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등장한 기방(妓房)은 기생의 거처인 동시에 영업 공간이었다. 기방의 기생은 의녀와 침비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여러 가지 사유로 한양에 올라왔다가 내려가지 않은 향기(鄕妓)들도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국문소설「게우사(誡愚詞)」의 주인공 무숙이와 평양 기생 의양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고, 또 다른 조선 후기의 한문단편집인 「차산필담(此山筆談)」의 이란 야담에도 나타난다. 종로(鐘路)의 큰 기방에 있는 기생이 자신을 “저는 본래 평양 교방(敎坊)의 일등이었습니다. 개성의 대상(大商) 백유성(白惟性)이 만금을 투자하여 이 누대를 꾸미고 저를 술청에 앉혀두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우리 옛 뿌리 2021.09.01

조선의 기생 20 - 방직기

「부북일기(赴北日記)」에는 기생, 주탕, 방직기라는 호칭이 모두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을 모두 통틀어 창기(娼妓)로 부르는 예가 많다. 하지만, 부북일기(赴北日記)」에 이렇게 호칭을 나눈 것을 보면 이들 사이에는 지금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관비(官婢)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생(妓生)인데 일명 주탕(酒湯)이라고도 하고, 하나는 비자(婢子)인데 일명 수급(水汲)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기생과 주탕을 같은 개념으로 취급하였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이 흥청의 숫자를 채우는 일로 고민할 때 “평안도 풍속에 자색이 있는 관비(官婢)를 주탕(酒湯)이라 하는데, 혹은 노래 혹은 음률을 알아 또한 간택할 만합니다...

우리 옛 뿌리 2021.08.08

조선의 기생 19 - 노류장화

박취문과 그 일행의 엽색(獵色)행각은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1월 21일] 윤신길이 이른 아침에 방문했다. 기천(岐川) 정자(正字)의 아들 한희주(韓希注)가 들렸다. 식후에 천총(千摠) 이집을 만났다. 집주인이 나를 위해 성대하게 음식을 장만하여 주니 여러 동료들을 청하여 함께 먹었다. 매우 감사하였다. 저녁에 기생 4, 5명을 불러보았다. [1월 23일] 병영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방(同榜) 급제자 김찬(金贊)이 술을 가져와서 마셨다. 정오에 홀로 향교에 갔는데, 훈장 문일장(文日章)과 유사(有司) 이정겸(李廷謙), 원기(元琦)가 명륜당 위로 맞이하여 술상을 차려주어서 크게 마시고 돌아왔다. (중략) ​날이 어두워질 때 사향소(四鄕所), 향교의 사임(四任) 한희주(韓希注), 주목(朱楘) 등이 술과 안..

우리 옛 뿌리 2021.07.27

조선의 기생 18 - 성(性)풍속

유학(儒學)의 나라 조선은 ‘남녀(男女)’하면 ‘유별(有別)’이란 단어부터 떠오를 정도라, 남녀 간의 관계가 매우 엄격한 만큼 성관계도 매우 절제되었을 것이라는 선입감을 갖게 된다. 물론 지배계층인 양반들 사이에서는 그런 모양새를 갖추려 노력했고 또 갖춘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양반들은 신분이 다른 계층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잣대를 적용했다. 양반 부녀자들은 수절이니 정절이니 하는 가치관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아래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가치관을 따르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다. 기생이나 노비의 정절은 지킬 만한 가치도 없고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조와 인조 때 각기 부방(赴防)을 했던 부자(父子)가 있었다. 부방(赴防)이란 무과(武科)에 급제한 무관(武官)들이 아직 벼슬에 오르기 전, 서북..

우리 옛 뿌리 2021.07.23

조선의 기생 17 - 사회적 인식

머리를 얹지 않은 10대 초반의 나이 어린 여자 기생을 동기(童妓)라 하고, 이들은 머리를 올린 뒤에야 정식 기생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기는 지방의 교방(敎坊)에서 악가무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기예(技藝)를 닦는 동안에도 여악에 동원되는 일이 있었다. 지방의 향연에 동원되기도 하고, 특히 궁중정재 가운데 연화대(蓮花臺)와 선유락(船遊樂)에서는 나이 어린 여악(女樂)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기들이 머리를 얹는 것은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분이 관기(官妓)이기 때문에 이것도 관아에서 관여를 했다. 동기가 머리를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기생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예의 습득수준이 먼저지만 그와 함께 나이도 고려사항에 포함되었다. 대략 15세 전후다. 일반적으로 노비는..

우리 옛 뿌리 2021.07.17

조선의 기생 16 - 기생의 지아비

인조(仁祖) 대 이후로는 서울에 악가무를 전업으로 하는 장악원 여기(女妓)를 따로 두지 않았다. 소위 경기(京妓)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물론 내의원, 혜민서의 의녀(醫女)와 공조, 상의원의 침선비(針線婢)는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그들은 장악원 소속도 아니고 연향에 보조자로 동원될 뿐 악가무가 주업도 아니다. 그래서 궁중의 연향행사가 있으면 그때마다 각 지방에서 뽑아 올린 선상기(選上妓)들이 서울로 올라왔다가 궁궐 행사를 마치면 다시 자기 소속 고을로 돌아가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런 체제는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계속 유지되었고, 영조 대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에도 “진연 때에, 여기 52명을 선상한다. 특별한 지시가 있으면 가감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서울에 따로 머물 곳이 없는 이들 선상기들이..

우리 옛 뿌리 2021.07.07

조선의 기생 12 - 황진이

기녀(妓女)는 기역(妓役)이 부과된 천인 여자들이다. 천민의 노비(奴婢) 중에서 뽑힌 자들이니 애초부터 신분상으로 대접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고, 변방 무관의 살림을 돌보아주는 방직기나, 지방관아의 각종 행사와 사신 접대에 동원되는 관기로서의 역할도 사회적으로 존중받을만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수청이라는 명목으로 이 남자 저 남자와 몸을 섞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일상은 유교사회의 관점에서는 ‘상것 중에서도 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광대’ 창(倡)자를 써서 창기(倡妓)라고 불리던 호칭이 시간이 가면서 ‘몸 파는 여자’라는 뜻을 갖는 창(娼)자와 섞여 쓰이다가 나중에는 거의 창기(娼妓)로 굳어진 것만 보아도 기생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시각을 짐작할 수가 있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였던 반계(..

우리 옛 뿌리 2021.06.09

조선의 기생 11 - 솜방망이 처벌

지금도 일반 서민의 삶을 ‘ㅈ’도 모르는 판사들이 세상 물정이나 민심과 동떨어진 어이없는 판결을 싸놓는 통에 법을 우습게 아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듯이, 조선시대의 축첩(蓄妾)에 대한 원칙 없고 물렁한 징계는 사대부들의 몰염치를 부추겼다. 황음무도함을 이유로 모든 백성의 아버지라는 왕까지 몰아내놓고도,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염치도 없이 국가의 재산인 관기들을 취하여 첩으로 삼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이중성을 보였다. 물론 이런 행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기는 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재위 8년인 1513년에 변경을 지키는 장수(將帥)들인 변장(邊將)들이 축첩(蓄妾)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1539년에..

우리 옛 뿌리 2021.06.02

조선의 기생 10 - 기생 첩

허조(許稠, 1369 ~ 1439)는 태종과 세종을 도와 조선 초기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강직한 발언으로 좌천되기도 하고 귀양도 갔다. 죽은 뒤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고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묘정(廟庭)에 배향된다는 것은 임금이 생전에 총애하던 신하나 공로가 있는 신하의 신위(神位)를 임금의 사당에 함께 모셔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조선 중기에 성현(成俔)이 지은 필기잡록(筆記雜錄)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허조(許稠)에 대한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허문경공은 조심스럽고 엄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엄격하고 법이 있었다. 자제의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許公)은 평..

우리 옛 뿌리 2021.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