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JAPAN 430

조선과 왜(倭) 15 - 왜(矮)놈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물론 때로는 열등감과 시기심이 더 크게 작용한 때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밑바탕에는 적어도 일본에게는 지지않는다는 결기와 오기가 늘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일본 또한 우리를 한 수 아래로 보고 무시해왔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는 두 나라는 이제는 아예 대놓고 상대방을 혐오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일본이 언제부터 우리를 무시하게 되었을까? 국경을 마주한 나라들 간의 숙명처럼 태생적 경쟁심과 시기심이 서로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이 감히 우리를 넘볼 생각을 갖게 된 시기는 생각보다 짧다. 명치유신(明治維新) 이전 에도막부시절의 왜국은 쇼군이 바뀔 때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어떻게든 조선의 통신사를 자국에 초청하려고 ..

우리 옛 뿌리 2020.10.08

조선과 왜(倭) 14 - 정덕원년신묘년조선통신사행렬도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덕원년신묘년조선통신사행렬도권(正德元年辛卯年朝鮮通信使行列圖卷)》이라는 이름의 행렬도는 왜국에서 제작된 것이다. 정덕(正德), 일어로 ‘쇼토쿠’는 에도막부의 6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가 1711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연호다. 따라서 정덕원년은 1711년을 뜻한다. 숙종 37년이던 이 해에, 이에노부의 쇼군 습직을 축하하는 통신사가 파견되었었다. 《정덕원년신묘년조선통신사행렬도권》은 당시 에도 도쿠가와막부의 노중(老中)인 쓰치야 마사나오(土屋直政)의 명령에 의해 제작되었다. 도쿠가와막부의 직제는 다이로[大老]라는 최고직 1명을 비상근(非常勤)으로 두고, 그 밑에 로쥬[노중(老中)] 4,5명이 정무를 총괄하는 방식이었다. 로쥬는 본래 쇼군의 의사를 하달하거나 ..

우리 옛 뿌리 2020.10.02

조선과 왜(倭) 13 - 사로승구도 5

5월 21일. 【아침에는 비가 조금 내리다가 늦게는 개었다. 마주수(馬州守)가 말을 전하여 사시(巳時)에 함께 떠나자고 약속하더니, 늦어서야 마주수가 먼저 떠난 것을 들었다. 세 사신과 원역(員役)들은 오사모(烏紗帽)에 홍포(紅袍)를 갖추고, 비장(裨將)들은 융복(戎服)에 고건(櫜鞬)으로 국서(國書)의 전배(前陪)가 되어, 위의(威儀)를 갖추어서 차례로 떠났다. 일행의 종자(從者)도 다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배행(輩行)하여 정제하였다. 왜인은 전어관 2인이 교자 앞에 보행으로 벌여 가고, 교군의 옷도 죄다 새롭다. ▶사시(巳時) : 십이시(十二時)에서는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이십사시(二十四時)에서는 오전 아홉 시 반부터 열 시 반까지. ▶전배(前陪) :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나 상관을 배견할 때에 앞..

우리 옛 뿌리 2020.09.29

조선과 왜(倭) 12 - 사로승구도 4

5월 12일, 훈천이라는 곳에 묵었다. 【이른 아침에 마주수(馬州守)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말 전하기를, “앞길에 대정천(大井川)이 있는데, 감수하는 자가 사람을 보내와 알리기를, ‘초여드렛날 큰 비 뒤에 먼 데 물이 비로소 내려와 이제 한 길이 넘는다.’하니, 형세가 여기 머물러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한다. 대개, 먼저 다녀간 이의 일기를 보니, 이 냇물은 매우 급하여 배다리를 쓰지 않고 받침대로 메어 건너는 곳이다.】 훈천에서 3일을 묵고 난 5월 15일에, 강물이 줄었다며 아침 4시경에 길을 떠나야한다는 연락이 왔다. 【널다리 세 곳을 건너 대정천에 이르니, 내는 산골 물이어서 물길이 매우 빠르고 깊이도 어깨가 묻히므로, 타고 가던 교자를 멈추고서 바로 들것[架子] 위에 얹었다...

우리 옛 뿌리 2020.09.28

조선과 왜(倭) 11 - 사로승구도 3

5월 2일 평방을 출발하여 가는 길에 정포(淀浦)라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정포(淀浦)는 산성주에 속하며, 주성(州城)은 강에 임하여, 성가퀴를 설치하지 않고서 행각(行閣)ㆍ판벽(板璧)으로 두르고, 흰 흙을 새로 칠했으며, 간간이 구멍을 낸 것은 우리나라 성의 제도와 같다. 3~4층의 망루가 곳곳이 솟아 있으며, 호수를 끌어다가 성을 둘렀는데 폭이 백여 보(步)이다. 성 밖에 수차(水車) 둘을 설치하여 물을 끌어서 성에 들이는데, 그 모양은 소거(繅車) 같고, 높이는 두세 길이며, 호수 안으로 드리워져 물결 따라 절로 돈다. 그 바퀴의 살은 모두 16이고, 살마다 작은 통을 달아서 수레가 돌 적에 통이 물을 담아서 수레를 따라 올라가서 절로 성 구멍에 쏟는데, 나무를 파서 만든 통이 보기에 매우 기이하..

우리 옛 뿌리 2020.09.27

조선과 왜(倭) 10 - 사로승구도 2

통신사 일행은 4월 15일 도모노우라[도포(韜浦)]에1박을 하게 되는데 《사로승구도》두루마리에 배접한 순서는 도모노우라의 그림보다 이라는 그림이 먼저 나온다. 그러나 하진(下津)은 도모노우라에서 다음 숙박지인 일비(日比)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섬이라, 이는 배접하면서 순서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선창에 들어가 배를 대니, 선창의 만듦새는 적간관(赤間關)과 같다. 언덕 끝의 높은 벼랑을 보니 위에 높다란 누각이 있고, 뜰 가운데에는 창ㆍ칼을 벌여 세워서, 대진(對陣)해 있는 것과 다름없다. 물어 보니, 요망(瞭望)하는 곳이라 한다. 저물녘에 국서(國書)를 받들고 뭍에 내렸다. 선창으로부터 관소까지는 거의 3~4리쯤 되는데, 거적을 이어 깔아서 조금도 흙이 드러나지 않고, 길 양쪽에는 집집이 모두 등 하..

우리 옛 뿌리 2020.09.26

조선과 왜(倭) 9 - 사로승구도 1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사대부들이 견문록 형식의 글을 남겼다면, 화원(畫員) 중에는 그림을 남긴 경우도 있다. 영조 24년인 1748년, 왜국에 파견되었던 통신사절에 도화서화원(圖畫署畫員) 이성린(李聖麟, 1718 ~ 1777)이 최북(崔北)과 함께 통신사 수행화원 자격으로 동행했었다. 이때 이성린은 부산(釜山)에서 에도(江戶)에 이르는 통신사행의 여정에서 왜국의 경승지와 주요 사건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가 그린 총 30점의 그림들은 ‘배(뗏목) 타고 가는 길의 경승지(景勝地)’라는 의미의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그림이 각각 15점씩 나뉘어 두 개의 두루마리 형태로 전하지만, 원래는 한 장씩 따로 그린 것을 나중에 두루마리 형태로 배접한 것이다. 상권으로 불리는 두루마..

우리 옛 뿌리 2020.09.25

조선과 왜(倭) 8 - 통신사(通信使)

조선이 왜국 막부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총 20회로 임진왜란 전이 8회, 임진왜란 후가 12회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7년부터 세 번에 걸쳐 파견된 사절단을 ‘회답겸쇄환사’라고 부른 것 외에는 모두 통신사(通信使)로 불렸다. 인조 14년인 1636년부터 파견된 통신사들은 막부의 새로운 관백(關白)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1590년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關白)을 자처하면서부터, 이전에 쇼군[將軍]이라 불리던 막부의 수장(首長)은 관백(關白)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를 통하여 통신사를 파견하는 절차는 대체로 동일하였다. 일본에서 새로운 관백이 책봉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조선에 그 사실을 알리는 관백승습고경차왜(關白承襲告慶差倭)를 먼저 파..

우리 옛 뿌리 2020.09.23

조선과 왜(倭) 7 - 왜노(倭奴)

조선과 왜국의 외교관계는 조선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이 태종 3년인 1403년에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왜국 막부의 아시카가[足利義滿] 장군도 다음 해에 책봉을 받으면서, 조선과 왜국은 서로 사절을 파견하는 외교관계를 갖게 되었다. 조선 국왕과 왜국 막부 장군은 양국의 최고통치자로서 현안 해결을 위한 사절을 서로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 조선에서 보내는 사절은 통신사(通信使), 왜국이 보내는 사절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부르기로 하였다. ‘통신(通信)’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해 교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왜국에 파견한 사절이 모두 통신사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왜국에서 사신을 보낸 것에 대한 답례로 보내는 사신은 회례사(回禮使)나 보빙사(報聘使)라 했고, 그 외에 조..

우리 옛 뿌리 2020.09.21

조선과 왜(倭) 6 - 왜사(倭使)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그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세워 정권을 장악하자, 왜국은 조선의 사정에 밝은 대마도주에게 외교권을 주어 1599년부터 160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어 외교 교섭을 요청해왔다. 조선은 왜국의 진의를 파악하가 위하여, 그 선행조건으로서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 왜란 중 왕릉을 훼손한 왜인을 압송해올 것, 조선 포로를 송환할 것 등의 3개 조건을 제시하였다. 왜국이 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광해군 1년인 1609년,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외교권을 위임받은 대마도주와 왜국과의 통교에 관한 약조를 맺는데 이를 기유약조(己酉約條)라고 한다. 약조문은 조선이 왜국에게 통교(通交)를 허락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옛 뿌리 2020.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