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JAPAN 430

조선과 왜(倭) 5 - 왜변(倭變)

성종 25년인 1494년, 조선에서 사는 항거왜인은 80%가 제포에 살고 있었고, 부산포가 15 %, 염포가 5% 정도의 분포였다고 한다. 조선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 거류자들의 수는 해마다 증가하여 1503년에는 2천여 명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성종 때에 거론되었던 세금 징수문제조차 대왜교린(對倭交隣) 차원에서 계속 집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왜인들은 조선의 관용책을 악용하여 빈번하게 범법행위를 저질렀고 연산군 대를 거치면서 그 도가 절정에 달하였다. 왜구의 출몰은 백성들이 주로 피해를 입지만, 그 불똥은 관리들에게도 튀었었다. 실록에는 왜구의 출몰로 인하여 조선의 관리들이 국문을 당하고, 귀양 가고, 목숨까지 잃는 기사들이 수도 없이, 정말 수도 없이 나온다. 왜구의 침..

우리 옛 뿌리 2020.09.18

조선과 왜(倭) 4 - 항거왜인(恒居倭人)

조선 조정에서는 초기부터 조선에 거주하기를 원하는 항거왜인들에게 집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해주었다. 대마도는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기 어려워 늘 외부에서 구해왔는데, 왜국 본토에서도 구했겠지만 고려 말부터는 조공이라는 명목으로 물품을 진상하고 그 대가로 미곡을 받아갔는데 이것이 조선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니까 최근 소니엔터테인먼트에서 내놓은 ‘고스트 오브 쓰시마’라는 게임에 넓은 초원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 자체가 개구라인 것이다. 늘 식량이 부족했던 터라 대마도 주민들은 평소에도 해적질을 주업이나 부업으로 삼았지만, 특히 가뭄과 기근이 들 때에는 그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그들이 해적질과 강도질을 하는 대상이 가까운 우리나라였기에, 조선으로서는 왜구로 인하여 백성이 피해를 입고 나라가 ..

우리 옛 뿌리 2020.09.17

조선과 왜(倭) 2 - 대마도

장군출신이었던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왜구의 피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위 초부터 왜구대책에 부심해 이를 방어하는 한편 왜인의 왕래와 귀화를 장려하고 우대하는 등의 유화정책을 썼다. 조선이 건국 때부터 "오는 자는 막지 않고 가는 자는 쫓지 않는다(來者莫拒去者勿追)"는 정책을 펼치고 평화적 통교관계를 수립하자, 왜구는 줄어들고 대신 귀화자가 늘게 되었다. 당시 조선으로 온 왜인들은 사송왜인(使送倭人), 흥리왜인(興利倭人), 향화왜인(向化倭人), 항거왜인(恒居倭人)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송왜인은 외교 사절로 오는 왜인, 흥리왜인은 무역상인, 향화왜인은 조선에 귀화한 왜인, 항거왜인은 귀화는 하지 않고 왜관에 계속 거주하는 왜인이란 의미이다. 향화왜인 중에는 학문이나 기술을 ..

우리 옛 뿌리 2020.09.14

조선과 왜(倭) 1 - 왜구(倭寇)

왜(倭)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섬나라가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을 갖기 전, 열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5세기 초기부터 약 1세기 동안의 섬나라 다섯 왕들 역시 스스로를 왜왕(倭王)이라고 자처했었다. 왜나라 ‘왜(倭)’ 자에 ‘유순(柔順)하다’는 뜻이 있다는 것은 의외이다. 강자에게는 고분고분한 섬 민족의 특성은 일찍부터 다 드러났던 모양이다. 이 ‘유순'한 족속들이 도적으로 돌변하여 왜구(倭寇)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인 13세기부터이다. 고려 때의 기록으로는 1223년에 왜구가 지금의 김해인 금주(金州)에 침입했다는 것이 가장 앞선 것이다.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몽골과 한창 전쟁 중이던 때였다. 왜구는 1265년까지 고려를 11번 침입하였다. 기록으..

우리 옛 뿌리 2020.09.13

토정(土亭) 이지함

《조선왕조실록》에는 조헌이 평생에 세 인물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이 이 세상에서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이 셋이 있는데 이지함·성혼·이이입니다. 세 사람이 성취한 학문은 다른 점이 있지만 깨끗한 마음과 욕심을 적게 가지는 자세, 그리고 뛰어난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되는 것은 똑같은데, 신이 일찍이 그들의 만에 하나라도 닮아보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제독(提督)의 임무를 맡고 나서 알량한 재주와 견문을 헤아리지 않고 세 사람이 신에게 가르쳐 준 것으로 어진 선비들을 깨우치려 하였으나...】(《선조수정실록》 선조 19년(1586년) 10월 1일 3번째 기사) 조헌이 스승으로 꼽은 세 사람 중 이이와 성혼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학자들인 반면, 이지함은 「토정비결」이 먼저 떠올라 의아한 ..

우리 선조들 2020.08.18

조헌 2 - 칠백의총

병자호란 때의 대표적 척화파였던 김상헌(金尙憲, 1570 ~ 1652)이 쓴 조헌의 신도비명에는 조헌의 어린 시절과 성품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천성이 효순(孝順)하고 태도가 순진(純眞)하고 확고하였다. 집안이 본래 농사에 종사하였는데 또래 아이들을 따라 놀이를 즐기지 않았고 일체의 행동을 부친의 명에 따라 부지런히 일하였다. 평소에는 독서에 열중하여 눈에 신외(身外)의 일을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동배(同輩)들이 깍듯이 섬기고 감히 함부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게 되고부터 벌써 부모를 섬기는 예절을 알았으므로 부모가 명하시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대답하였고 매사를 공경스럽게 받들었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서 계모(繼母)에게 실애(失愛)하였으나 마침내 계모의 마음을 기쁘게..

우리 선조들 2020.08.13

이게 나라다!

우리나라 정부가 조만간 한국 출신 해외 입양인들에게 마스크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해외에 있는 한국 국적의 가족에게 한 달에 마스크 8장을 국제 우편으로 보낼 수 있다. 하지만 해외 입양인들은 대부분 현지 국적을 취득한 상태인데다 국내에 별다른 연고가 없어서 이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런 그들을 돕기 위하여 정부가 나선 것이다. 현재 유럽과 미국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출신 해외 입양인은 모두 16만 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오늘까지 전 세계 공관들로부터 수요를 취합하여, 수량이 정해지는 대로 마스크를 구매하여 지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정부의 이런 계획은 지난주 입양단체들이 수요 조사를 위한 공지와 함께 한국 정부에 감사하는 글을 올리면서 알려졌다. 해외의 입양단체..

나라다운 나라 2020.04.28

옛날이야기 11 - 진사와 생원

“건너 마을에 최진사댁에 딸이 셋 있는데....”라는 노래가 있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소견이 좁은 사람을 놀리는 표현으로 ‘꽁생원’이라는 말도 있다. 진사는 뭐고 생원은 무엇일까? 막연하게 조선시대의 관직명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은 벼슬이 아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직사(職事)가 있는 실직(實職)1으로 양반이 등용될 수 있는 관직은 문관과 무관을 합쳐 총 5,605과(窠)2였다. 문관 동반직(東班職)이 1,779과, 무관 서반직(西班職)이 3,826과였다. 그 중에서도 녹봉을 제대로 지급받는 정직녹관(正職祿官)은 2,400과뿐이고 나머지는 교대로 근무하며 근무 때만 녹봉을 받는 체아직(遞兒職)3이거나 아예 녹봉이 없는 무녹관(無祿官)들이었다. 정직녹관 중 수도..

우리 옛 뿌리 2019.08.13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8

남녀의 직접적인 성 풍속을 소재로 한 풍속화를 춘화(春畵)라고 한다. 유교적 윤리관이 투철했던 조선에서는 춘화(春畵)의 등장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늦었다. 명나라 말엽부터 늘어난 중국의 춘화와 우키요에(浮世繪) 화파의 등장과 함께 활발해진 일본의 춘화가 중국과 일본을 다녀온 인물들에 의해 이따금 조선에 알려졌지만 그것이 널리 퍼질 사회 분위기는 아니었다. 유교적 가치를 신봉했던 조선의 사대부들로서는 노골적인 남녀 간의 성애 그림을 해괴하게 여겼을 것이고 그런 그림을 들여다봤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질책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조선에서도 춘화가 등장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춘화가 유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의 강한 유교적 윤리 의식으로 인하여 중국이나 일본에 비할 바는 못 되..

우리 옛 그림 2019.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