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の獨島 55

목민심서 70 - 음식 사치는 재앙을 부르는 일이다.

● 율기(律己) 제3조 제가(齊家) 8 음식을 사치스럽게 하는 것은 재화(財貨)를 소비하고 물자를 탕진하는 것이니 재앙을 불러들이는 길이다. (飮食之侈 財之所糜 物之所殄 招災之術也)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가정을 바로 다스리는 것‘을 뜻하는 제가(齊家)는 그 가운데 3번째이다. 후한(後漢) 공분(孔奮)이 고장(姑臧)의 수령이 되었는데, 오직 늙은 어머니만은 아주 진수성찬이었고 처자들의 밥상에는 파와 겨자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공분을 조롱하기를, “기름 속에 넣어두어도 스스로 윤택할 줄 모른다.” 하였다. 조어(趙峿)가 합천 군수(陜川郡守)가 되..

목민심서 2021.09.06

관서십경도(關西十景圖) 4

개천(价川)은 대동강과 청천강 사이에 끼어 있는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청천강이 흐르고 남쪽 기슭에는 대동강이 흐른다. 무진대(無盡臺)는 개천군 남쪽 대동강변 절벽에 있던 누각이다. 강변의 벼랑과 주위 경관이 수려하기로 이름난 명승지였다고 한다. 18세기 초 평안도 성천(成川)의 명기(名妓)로 가무와 시문에 뛰어났던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이 남긴 이라는 시이다. ​秋湖十里繞群巒 : 가을 호수 십리를 여러 산이 둘러싸고 一曲淸歌倚彩欄 : 맑은 노래 한 곡조 부르며 채색 난간에 기대었네. 浩浩臺前流去水 : 누대 앞을 흘러가는 넓고 넓은 강물 終歸大海作波瀾 : 끝내는 큰 바다로 돌아가 파도를 이루리라. 강계(江界)는 평안도 북동부에 있던 군(郡)으로 고구려가 일어난 땅으로 알려져 있다. 강계읍성은 성종 3..

우리 옛 그림 2021.09.05

조선의 기생 23 - 청루(靑樓) 홍루(紅樓)

기방의 고객을 오입쟁이라 하는데, 강명관의 「조선풍속사」에는 이 오입쟁이들이 기방에 처음 나온 기생을 길들이는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한 사람이 좌중에 통할 말 있소.” “네, 무슨 말이요.” “처음 보는 계집 말 묻겠소.” 이렇게 운을 떼면 “같이 물읍시다.” 또는 잘 물으시오.“라고 한다. 이 말이 떨어지면 “이년아, 네가 명색이 무엇이냐?”라고 묻고, “기생이올시다.”라고 하면, “너 같은 기생은 처음 보았다. 이년아, 내려가 물이나 떠오너라.”하고 뺨을 약간 때린다. 이건 기생이 아니라 하인이 아니냐는 수작이다. 기생이 여전히 “기생이올시다.”라고 하면 “이년아, 죽어도 기생이야”라고 하고, 여기에 또 “기생이올시다.”라고 답하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네가 하- 기생이라 하니,..

우리 옛 뿌리 2021.09.03

허균 19 - 한정록(閑情錄) 한적(閒適) 2

● 낙성(洛城) 안팎 60~70리 사이의 모든 도관(道觀)과 불사(佛寺)와 고적지(古跡址)와 별장 가운데 천석(泉石)이나 화죽(花竹)이 있는 곳은 놀아보지 않은 데가 없고, 좋은 술과 거문고가 있는 인가(人家)는 들러보지 않은 데가 없고, 도서(圖書)와 가무(歌舞)가 있는 곳은 구경하지 않은 데가 없다. 낙천(洛川)의 수재(守宰)로부터 포의가(布衣家)에 이르기까지 연유(宴遊 :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놂)할 일로 부르는 자가 있으면 또한 때때로 찾아갔다. 매양 좋은 계절, 좋은 경치나 혹은 눈 내린 아침, 달뜨는 저녁에 호사자(好事者)들이 서로 찾아올 때면, 반드시 그들을 위해 먼저 술항아리를 꺼내 마시고 다음엔 시 상자[詩篋]를 열어 놓고 읊으며, 술이 이미 거나해지면 이내 거문고를 가져다가 궁성(宮聲)..

우리 선조들 2021.09.02

사과가 빨갛다고 맛있는 것은 아니다.

추석이 다가온다. 과일, 그 중에서도 사과는 가장 일상적인 추석선물의 하나다. 백화점에서 선물용으로 파는 사과들은 하나 같이 빨갛고 크다. 따라서 값도 비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사과들은 보기에 먹음직하면 맛도 좋다는 속설을 깨뜨린다. 이 사과들은 애초에 맛있는 사과를 생산해내기 위해 재배된 사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과 특유의 향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냥 보기에만 좋은 사과일 뿐이다. 각 지역 농협에서 사과를 수매할 때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색깔과 크기다. 겉모양만 좋으면 맛과는 상관없이 높은 등급을 받고 높은 가격을 받는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굳이 사과 맛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맛있는 사과보다는 보기 좋은 사과를 키워내야 더 소득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나무 ..

조선의 기생 22 - 기방 풍속

조선 전기에는 기생의 거처를 창가(娼家)라고 불렀다. 그저 기생이 유숙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등장한 기방(妓房)은 기생의 거처인 동시에 영업 공간이었다. 기방의 기생은 의녀와 침비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여러 가지 사유로 한양에 올라왔다가 내려가지 않은 향기(鄕妓)들도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국문소설「게우사(誡愚詞)」의 주인공 무숙이와 평양 기생 의양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고, 또 다른 조선 후기의 한문단편집인 「차산필담(此山筆談)」의 이란 야담에도 나타난다. 종로(鐘路)의 큰 기방에 있는 기생이 자신을 “저는 본래 평양 교방(敎坊)의 일등이었습니다. 개성의 대상(大商) 백유성(白惟性)이 만금을 투자하여 이 누대를 꾸미고 저를 술청에 앉혀두었습니다.”라고 소개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우리 옛 뿌리 2021.09.01

목민심서 69 - 의복은 검소하게 하라.

● 율기(律己) 제3조 제가(齊家) 7 의복의 사치는 뭇사람이 꺼리는 바이고 귀신이 질투하는 바이니 복을 꺾는 길이다. (衣服之奢 衆之所忌 鬼之所嫉 折福之道也)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고, '가정을 바로 다스리는 것‘을 뜻하는 제가(齊家)는 그 가운데 3번째이다. 도리를 아는 부인은 극히 적다. 대부분 모두 소견이 얕아서 남편이 수령이 되었다는 말만 들어도 곧 한 보따리 부귀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장식과 패물들을 가장 아름답게 하기에 힘쓰며, 저전(邸錢)을 함부로 가져오게 하여 아파(牙婆) - 속칭 방물장수 - 들을 널리 불러 ..

목민심서 2021.08.28

조선의 기생 21 - 주점과 기방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거치면서 생겨난 국가적 혼란은 조선의 사회적 변동을 불러왔다. 왜란 이후 남발한 공명첩(空名帖)과 그 관리 부실은 조선 사회의 중심축이었던 신분제도를 문란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숙종 때까지만 해도 전체 인구 중 6%밖에 되지 않았던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 정조 대에는 30%에 이르고 고종 때에는 인구의 9할이 양반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양반에 대한 권위를 떨어뜨렸다. 그런 와중에 사대부와 관료 중심의 조선사회에 새로운 신분 세력이 떠올랐다. 신흥 부유층이다. 종래의 조선사회에서는 부(富)마저도 양반들이 독점했었지만, 상업과 교역이 발전하면서 활발한 경제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부상(富商)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의관(醫官), 역관(譯官)과 같은 ..

우리 옛 뿌리 2021.08.22

허균 17 - 한정록(閑情錄) 고일(高逸) 2

● 양적(陽翟)의 신군(辛君)은 선배들 가운데 어진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덕으로 벼슬을 얻었으나 은거(隱居)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는 소자용(蘇子容) 승상(丞相)의 처남(妻男)이고 이정(二程 :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선생의 외숙(外叔)이다. 당시 소 승상이 한창 성할 때여서 자주 그를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천(伊川 : 정이(程頤)) 선생이 원풍(元豐) 연간에 해마다 낙중(洛中)으로부터 와서 영창(潁昌)에 있는 한지국(韓持國 : 지국은 한유(韓維)의 자)을 방문했는데, 양적을 지날 때는 반드시 신군의 집에서 10여 일씩 머무르곤 하였다. 그의 집에는 7칸짜리 대옥(大屋)이 있었는데, 집 뒤에는 온통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피어 있어 평생토록 자락(自樂)하였다. 《와유록(臥遊錄)》 ●..

우리 선조들 2021.08.18

1884년 조선 사진

조선 말기의 사진에 해설을 덧붙인 흥미롭고 유익한 영상이다. 퍼시벌 로웰(1855 ~ 1926)은 호기심이 많았던 인물인 듯하다. 그는 보스턴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수학을 전공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문의 사업을 돕다가 일본에 관심이 생겨 일본을 방문한다. 그가 일본에 머물던 중, 1883년 5월에 주일 미국 공사의 주선으로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일행을 만나게 된다. 보빙사란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사절단을 의미하는데, 당시 로웰이 만난 보빙사는 조미통상사절단이었다. 전 해인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후 이듬해 미국의 공사가 조선을 방문한데 대한 답례와 양국 간의 친선을 위한 목적으로 파견되는 사절이었다. 보빙사 일행은 당시 28세였던 로웰의 안내를 받아 8월부터 11월까지 ..

우리 옛 뿌리 2021.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