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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11 - 영자팔법(永字八法)

앞 글에 유홍준 박사가 추사체 특징 한 가지를 영자팔법(永字八法)을 들어 설명하였는데 영자팔법의 내용을 간략하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영자팔법이란 중국의 서법을 '永'자의 여덟 필획으로 설명한 기법이다. 후한(後漢)의 채옹1(蔡邕 : 132 ~ 192)이 숭산(嵩山)의 석실(石室)에서 글을 배울 때 신수(神授)2 받았다고 하는데, 당나라 장희관의 『옥당금경(玉堂禁經)』과 임은의 『발등서(墢鐙序)』에도 이 내용이 보인다.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예서에서 시작하여 후한의 최원과 장지, 3국시대 위(魏)의 종요, 동진의 왕희지가이어받은 다음 수(隨)의 지영이 취지를 명백히 하고 당나라 초의 우세남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널리퍼졌다 한다. 해서(楷書)의 전형적인 체로서, 모든 글씨의 서법은 '永'자 한 자 속에 포함..

추사 김정희 2017.11.22

추사 김정희 10 - 남북서파론/북비남첩론

· 청나라는 가경(1796 ~ 1820) 연간으로 들어가면서 고증학의 정신을 이어받아 옛것에 대한 연구, 특히 고비 (古碑)를 연구하는 금석학이 크게 일어나 급기야 완원의 북비남첩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추사는 당시 청나라 학예계를 휩쓸고 있던 완원(阮元 : 1764 ~ 1849)의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금과옥조처럼 새기고 있었다. 완당의 제자들이 완원이 쓴 남국서파론을 별 의심 없이 완당의 글로 알고 『완당집』에 실었을 정도로, 완당의 서예론은 남북서파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글씨 쓰는 법이 변천되어 그 흐름이 마구 뒤섞였으니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옛날의 올바른 법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대개 예서로부터 시작하여 정서(正書, 楷書)와 행서 그리고 ..

추사 김정희 2017.11.21

추사 김정희 9-2 - 옹방강과 완원

추사는 1809년 10월 28일 자제군관(子第軍官)의 자격으로 동지부사1로 선임된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으로 떠났다. 자제군관이란 외교관의 아들이나 형제가 개인적으로 사행을 따라가서 외국견문을 익히게 하는 제도였다. 공식수행원이 아닌 만큼 연경에서 자유롭게 그곳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추사는 연경에서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며 견문과 학식을 넓혀갔으며 특히 평생 잊지 못 할 두 사람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담계 옹방강(翁方綱 : 1733~1818)이고 또 한 사람은 운대 완원(阮元 : 1764~1849)이다. 옹방강은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이며 경학의 대부로 자부하는 연경학계의 원로였고, 완원은 '청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일인자'라는 평을 받고 있던 ..

추사 김정희 2017.11.18

추사 김정희 9-1 - 개안(開眼)

추사체의 변천과정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셔먼호사건 때 평양감사를 지냈고 개화파의 선구이면서 그 자신 명필이었으며, 추사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박규수(1807 ~ 1876)는 당대의 안목으로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완옹(阮翁 :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基昌)1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연결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 (骨氣)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2와 미불3을 따르고 이북해4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지더니... 드디어는 구양순의 신수(神髓)를 얻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 2017.11.17

추사 김정희 8 - 추사의 위상

동양 서예사에서 추사의 위치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추사의 업적이란 낡은 법첩(法帖)을 따르는 매너리즘과 향토색에 젖어있던, 어딘가 촌티나는 조선의 글씨를 비문 글씨의 고졸하고 준경한 기품을 간직한 개성적 서체로 구현하여 국제적 감각의 신풍을 일으켰다는 점이라 한다. 그러나 추사체의 미술사적 의의는 우리나라 서예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중국 서예사를 포함하여 어쩌면 일본과 한국까지 포함한 동양 서예사, 사실상의 세계 서예사라는 틀에서 봐도 크다는 것이다. 추사가 살아생전에 활약한 시기는 19세기 전반기로 크게는 청나라, 좁게는 청나라 가경(嘉慶: 1796 ~ 1820), 도광(道光: 1821 ~ 1850) 연간이다. 이때는 청나라 서예가 딜레마에서 벗어나 남북조,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로 이..

추사 김정희 2017.11.14

추사 김정희 7-2 - 안평대군, 양사언, 한호

안평대군 이용 조선 초기의 글씨는 고려 말기에 받아들인 조맹부1의 서체가 약 200년간을 지배하였다. 그것은 고려 충선왕 때 직접 조맹부를 배운 서가(書家)기 믾았고, 또 조맹부의 글씨와 그의 법첩2이 다량으로 흘러 들어와서 그것을 교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의 송설체(松雪體)를 가장 잘 쓴 사람이 고려의 이군해와 안평대군 이용이었다 한다. 안평대군은 예술적인 천분을 타고나서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모두 능하였고, 궁중에서 성장하여 궁중에 수장된 많은 진적3을 보았으며, 진지하게 수련을 쌓아 그림도 잘 그렸다. 그의 글씨는 송설을 모방하는 한편, 자기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된 독자성도 나타내었다. 그의 진적은 현재 일본의 덴리(天理)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견의 의 발문4이 있고, 그외 국내에 몇 점의 진..

추사 김정희 2017.11.05

추사 김정희 7-1 - 신라 김생과 고려 탄연

우리나라의 역대 명필 보통 조선시대의 4대 명필로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의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의 김정희를 꼽는다. 여기서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과 김정희이다. 그러면 한 명만 꼽으라면 어떻게 될까? 김생 김생(711 ~ ?)은 통일신라시대 사람이었다.『삼국사기』 김생조에 의하면, “김생은 부모가 한미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팔십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1 고 한다. 김생은 왕희지의 법을 따르면서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서풍과 당(唐)대 초기 저수량의 필의를 짐작하여 개성이 뚜렷한 서..

카테고리 없음 2017.11.03

추사 김정희 5 - 서체의 종류 1

서예의 역사 붓글씨를 우리는 서예(書藝)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부른다. 서예라는 호칭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정부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가 처음 열리면서 붓글씨 부분이 다른 미술품과 함께 참여하게 되었을 때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고, 1945년에 손재형이라는 분이 조선서화동연회의 창립을 주도하면서 단체의 발족을 계기로 일제 강점기 때 사용하던 '서도'라는 말 대신, 글씨의 예술이란 뜻의 '서예'라는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그저 서(書)로 불렸다고 한다. 붓글씨는 한자를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한자는 상형문자의 특성을 갖고 있어서 태생적으로 조형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데..

추사 김정희 2017.10.30

추사 김정희 4 - 금강안 혹리수

금강안(金剛眼) 김정희에 대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가 가장 잘한 것은 글씨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글씨에 덮여 그가 지은 시가 뛰어남을 모른다는 이도 있다. 그런가하면 김정희는 시와 글씨 같은 예술이 아니라 금석학·고증학에 더 뛰어났다고도 하고,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은 모두 선학(禪學)에서 연유한 것이니 그것이 참모습이다 라고도 한다. 이렇듯 논자에 따라 김정희를 보는 시각이 다를만큼 김정희는 여러 분야에 뛰어났다. 그런 중 홍한주는 『지수염필』1에서 또 다른 시각으로 김정희를 말하고 있다. 【추사의 재능은 감상(鑑賞)이 가장 뛰어났고, 글씨가 그 다음이며, 시문이 또 그 다음이다.】 여기서 감상이란 미술품 감식(鑑識)을 의미한다. 완당은 스스로 미술 감상법을 이렇게 말했다. 【서화를 감상하는 데서는 금강..

추사 김정희 2017.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