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JAPAN 430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3

풍랑이 심하여 8월 21일은 배를 평도 항구 깊숙한 곳으로 옮겨 정박했다가, 22일 새벽에 순풍을 얻어 순식간에 황성도를 지나고, 한낮에는 진주문(眞珠門)을 거쳐 묘도(廟島) 앞 항구에 다다랐다. 묘도에서 등주까지는 80리라고 기록되었으니 마침내 육지인 등주(登州)를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여섯 척의 배 중에 5척은 도착했지만 제4선으로 불리는 배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도 험난한 바다를 무사히 건너온 기쁨에 사신 일행은 그날 저물녘에 신녀묘(神女廟) 앞으로 배를 옮기고 제문을 지어 해신(海神)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홍익한은 “이날 밤에 바람은 자고 물결은 고요하니, 뱃길을 떠난 후에 비로소 편안히 잠잘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다음날 저녁나절에 제4선이 뒤늦게 도착했다. 황성도(皇城島) 앞바..

우리 옛 뿌리 2020.11.24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2

사행에는 여섯 척의 배와 사백 여 명의 격군(格軍)이 동원되었다. 3척은 각각 정사, 부사, 서장관의 배인 기선(騎船)이고 나머지 3척은 봉물을 실은 복선(卜船)이었을 것이다. 8월 4일 선사포를 출발한 배는 포구를 벗어나기 무섭게 비바람이 크게 일어 결국 닻을 내리고 항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오후에 다시 출항하여 새벽에 가도(椵島)에 도착하였다. 가도는 철산 선사포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목장을 설치하여 감독관을 두고 말을 사육하던 곳 중의 하나였다. ▶격군(格軍) : 곁군의 취음(取音)이다. 수참(水站)에 소속 되어 배를 부리는 등의 일을 하던 수부(水夫). 당시 이곳에는 모문룡(毛文龍)이라는 명나라 장수가 명나라 군대와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후금에게 빼앗긴 요동지방을 ..

우리 옛 뿌리 2020.11.23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1

조선이 왜국 막부에 파견하는 사절단은 통신사(通信使)라고 불렀다. 교린(交隣)의 차원에서 믿음[信]으로 내왕한다는 뜻이다. 반면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은 조천사(朝天使)라고 했다.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왕조’인 천조(天朝) 중국에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뵌다’는 뜻의 조근(朝覲) 사행이라는 뜻이다. 명칭에서부터 사대(事大)가 분명하였다. 자존심 상하지만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명나라를 이은 청나라에 보내는 사절단의 명칭은 그간 연행사(燕行使)로 알려져 왔다. 연경(燕京)에 가는 사행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연행(燕行)은 개인적 여행의 뜻으로 쓰였고, 부경사(赴京使) 또는 부연사(赴燕使)가 정식 명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사대의 뜻은 없다. 현실적으로 내색이..

우리 옛 뿌리 2020.11.22

김홍도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4

빠진 39번은 환선정(喚仙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생 때 그린 것보다 채색한 『금강사군첩』에서는 말과 구종을 뒤로 멀찍이 물려 그렸다. 42번을 포함하여 45번부터 58번까지의 사생화는 없다. 내금강을 사생한 그림들이 빠졌다. 이후 59번의 숫자가 적힌 은 예전에는 강원도 북부였지만, 현재는 북한의 강원도 남동쪽에 해당하는 창도군(昌道郡)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예전 한양에서 함경도를 잇는 경흥로의 금성(金城)과 회양(淮陽) 사이에 송포진(松浦津)이라는 나루가 있었는데 그 송포진을 맥판진(麥阪津)이라고도 했다 한다. 맥판진 근처에 맥판이라는 험준한 벼랑길이 있는데 ‘돌길이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하여 어떤 곳은 말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곳이 있고 길가 400~500보 아래에는 산골물이 매우 험하였다’는..

우리 옛 그림 2020.11.21

김홍도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2

울진 평해의 월송정 다음은 북쪽으로 올라가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와 낙산사의 부속 암자인 관음굴(觀音窟)을 그렸다. 그림의 바다에 ‘심청(深靑)’이라는 글씨가 두 군데 보인다. 나중에 바다의 푸른색을 더 진하게 채색할 곳을 표시해둔 듯하다. 이어서 설악산으로 들어갔는데 21번과 22번이 빠지고 23번째 사생이 설악산의 와선대이다. 『금강사군첩』과 대조하면 21번과 22번 중 하나는 토왕성(土王城)폭포이다. 나머지 하나는 지금 전하는 『금강사군첩』에도 빠져있어, 사생은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그림을 완성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헤아려 볼 수 있다. 설악산에서 나와 계속 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일대 경치를 그렸는데, 사생 번호와 경로 상의 순서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25번은 고성의 청간정이고 26번은 중간의 해..

우리 옛 그림 2020.11.19

김홍도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1

1788년 가을 정조의 명을 받아 김홍도와 김응환이 50여일에 걸쳐 강원도와 금강산 일대의 절경을 그렸던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직도 진본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을 그때의 김홍도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97년에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을 구입하여 공개한 일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 목록에는 ‘전 김홍도필 해동명산도(傳 金弘道筆 海東名山圖)’로 되어 있는 이 첩은, 지난 해 ‘우리 강산을 그리다’ 특별전에서는 김홍도가 『금강사군첩』을 제작하기 위하여 현지에서 사생한 초본(草本)으로 소개되었다.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은 채색 없이 유탄(柳炭)과 먹으로만 그려져 있다. 하지만 『금강사군첩』과 대조하여 보면 비전문가라도 두 그림..

우리 옛 그림 2020.11.18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이라고 하면 흔히 아래 건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사진은 희정당의 남쪽 행각(行閣)일 뿐이다. 희정당 본 건물은 이 행각 뒤에 숨어있다. 희정당(熙政堂)이라는 이름의 건물 역사는 기구하다. 연산군 2년인 1496년에 지어진 이후, 임진왜란, 인조반정, 1833년, 1917년의 4번에 걸쳐 건물이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20년에 지어진 것이다. 《순종실록부록》순종 10년 11월 10일(양력) 기사는 1917년의 소실(燒失)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대조전(大造殿)에서 오후 5시에 불이 났다. 불은 대조전 서온돌(西溫突)에 연접한 나인(內人)들의 갱의실(更衣實)에서 일어나 내전(內殿)의 전부를 태워버렸다. [대조전(大造殿), 흥복헌(興福軒), 통명문(通明門)..

김명국 사시팔경도

‘연꽃 가득한 못’, 연담(蓮潭)이라는 고상한 호와 ‘취한 늙은이’, 취옹(醉翁)이라는 자조적인 호를 같이 썼던 화가가 있다. 옛 그림에 관심이 없어도 언젠가 모두 한번쯤은 보았을 그 유명한 를 그린 김명국(金明國)이다. 그의 생몰년도는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으나 1581년생인 이징(李澄)보다 20년쯤 뒤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김명국은 도화서 화원이었던 만큼 다양한 화목의 그림을 두루 잘 그렸고, 수묵과 채색을 모두 잘 다루었다고 한다. 그가 그린 산수화로 전하는 작품들은 안견파(安堅派)의 화풍을 따른 것도 있고 절파풍의 그림도 있는데 특히 절파풍의 그림들은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의 특징을 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명나라 절파(浙派) 후기의 화풍을..

우리 옛 그림 2020.11.16

종실(宗室)화가 - 이경윤 이징 4

이징은 부친 이경윤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옛 그림을 많이 보았을 것이고 또한 자연스럽게 그림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징은 안견파 화풍과 절파 화풍의 산수화를 모두 그렸는데, 때로는 안견파와 절파의 화풍을 혼용한 화풍도 보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안견파 화풍을 더 선호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왕실의 그림은 안견파 화풍으로 그리고, 왕실 외의 덜 중요한 그림 요구에는 간략한 절파화풍의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추리도 있다. 조선 성종 때의 대유학자였던 정여창(鄭汝昌)의 옛 별장을 그린 는 이징의 작품가운데 제작시기가 밝혀진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로 이징이 63세 때인 1643년에 그린 것이다. 글자를 붙여 써서 제목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방의 옛 이름인 화..

우리 옛 그림 2020.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