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236

심사정의 전이모사 1

심사정(1707 ~ 1769)은 겸재 정선(1676 ~ 1759)보다 약 30년 뒤의 화가다. 그가 활동하던 때 조선에서는 정선에 의해 주도된 소위 진경산수화가 한창 각광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심사정은 그런 시류와는 상관없이 중국의 전통 화법을 연구하는데 전념했다. 조선의 산수화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정형화된 산수화 기법을 이해하고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유지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심사정의 선택은 당연한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6세기경 중국 육조시대 남제(南齊)의 화가이자 화론가였던 사혁(謝赫)은 ≪고화품록(古畫品錄)≫에서 회화에서 중요시되어야 하는 육법(六法)을 제시한 바가 있다. 그 육법의 하나인 ‘전이모사(轉移模寫)’는 앞선 화가들의 그림을 모방하여 그리면서 그 기법을 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림..

우리 옛 그림 2022.03.09

강산무진도 속의 사람 사는 모습 3

이태백의 은 계속 이어진다. 劍閣崢嶸而崔嵬 검각(劍閣)은 삐죽삐죽 높기도 하여 一夫當關 한 명이 관문(關門)을 지키면 萬夫莫開 만 명도 못 당하고 所守或匪親 수문장이 친하지 않다면 化爲狼與豺 승냥이와 다를 바 없다. 朝避猛虎 아침엔 호랑이 피하고 夕避長蛇 저녁엔 구렁이 피하니 磨牙吮血 이로 으깨고 피를 빨아 殺人如麻 사람 잡아 낭자하다. 錦城雖云樂 금관성(錦官城)이 좋다고 해도 不如早還家 일찌감치 집으로 가느니만 못하리라. 蜀道之難 촉도의 험난함이여 難於上靑天 하늘 오르기보다 어려워라. 側身西望長咨嗟 몸 기우려 서쪽 향해 긴 한숨만 쉬노라. 검각(劍閣)은 잔도(殘徒)의 다른 이름이고 금관성(錦官城)은 사천성의 성도(成都)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명성이 자자한 금관성은 그 험한 산길 너머에 존재했다. ..

우리 옛 그림 2022.03.01

강산무진도 속의 사람 사는 모습 2

는 이인문 자신의 ‘전 생애에 걸친 조형적 사고와 역량이 잘 드러난 대작’이라는 평도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위대한 자연과 그 안에서 다양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을 소재로 탄탄한 구성과 다양한 화법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이인문 부분 6/14] 배에서 짐을 내려 나귀에 짐을 싣고 마을로 들어가는 짐꾼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마을에서는 이들을 마중을 나온 인물들의 모습도 보여진다. [이인문 부분 6/14의 부분 1] [이인문 부분 6/14의 부분 2] [이인문 부분 6/14의 부분 3] [이인문 부분 6/14의 부분 4] 산 속의 좁고 비탈진 길을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더라도 그 험준한 산 고개 너머에도 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도처유청산(人間..

우리 옛 그림 2022.02.27

강산무진도 속의 사람 사는 모습 1

조선 후기의 화가 이인문(李寅文)이 그린 는 그림의 크기로 볼 때 전하는 조선 그림 가운데는 심사정이 남긴 와 함께 가장 큰 대작으로 꼽힌다. 두루마리 형태의 이 그림은 세로 높이가 43.9cm에 길이는 856cm나 된다. 는 길이가 818cm로 약간 짧은 반면 세로 높이는 85cm로 보다 전체 그림의 면적은 훨씬 크다. ‘강산무진(江山無盡)’은 끝없이 이어지는 대자연의 모습을 가리킨다. 중국과 조선에서 즐겨 다루어지던 전통적 화제(畵題)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에서는 이인문의 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를 오른쪽부터 천천히 그림을 살펴보면, 만고불변의 자연과 그 자연의 섭리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다채롭게 표현되어 있다. 강과 산만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우리 옛 그림 2022.02.26

호계에서 세 사람이 웃다.

東林送客處 동림사에서 손님 배웅하는 곳에 月出白猿啼 달뜨고 흰 원숭이 우는데 笑別廬山遠 웃으며 헤어지는 여산의 혜원 스님은 何須過虎溪 어찌 호계를 건너는가! 이 시는 당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불리던 이백(李白)의 란 시이다. 이백은 자가 태백(太白)이고 우리에겐 이태백이란 이름이 더 친숙한 인물이다. 이태백이 지은 시는 고사(古事)를 소재로 한 것이다. 육조시대 동진(東晋)에 중국 정토교(淨土敎)의 개조(開祖)로 알려진 혜원(慧遠)이라는 고승(高僧)이 있었다. 유학을 배우고 도교에도 심취했었으나 21살 때에 도안(道安)에게서 반야경(般若經) 강의를 듣고 동생 혜지(慧持)와 함께 출가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혜원은 33살이 되는 386년부터 중국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라는 절에서..

우리 옛 그림 2022.02.22

심사정 - 옛 법을 따르다.

창작력을 중시하는 지금의 예술관과는 달리 옛 동양회화에서는 남의 그림을 모방하는 것은 전혀 흠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가의 좋은 그림을 모사(模寫)하면서 그 정신과 기법을 체득하는 것이 그림 제작의 중요한 요체로 장려되었다. 그래서 지금 전하는 옛 그림들에는 누구누구의 그림이나 필법을 ‘방(倣)’했다는 화제가 적힌 그림들이 많다. ‘방(倣)’은 특정한 화가의 화풍이나 사의(寫意)를 따랐다는 의미다. 조선 후기에는 주로 원(元)나라 말기의 산수화가 예찬(倪瓚)과 명나라의 문인화가였던 심주(沈周), 그리고 명나라 말기의 화가이자 서예가였던 동기창(董其昌)을 방(倣)한 예가 많다. 이들은 모두 남종문인화 계열의 화가들이었다. 전하는 심사정의 작품 중에 《방고산수첩(倣古山水帖)》이 있다. 어느 특정화가가 아닌..

우리 옛 그림 2022.02.18

심사정필산수도

조선시대에 이름을 얻었던 화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양반 신분으로 취미삼아 그린을 그림 이들과 전문 화원이다. 공재 윤두서와 관아재 조영석이 전자에 속하고 정선, 김홍도, 신윤복은 모두 전문 화원들이다. 그런데 이런 부류에서 벗어나 양반 신분이면서도 그림을 천직처럼 여기며 살아가야했던 인물이 있었다. 현재 심사정(沈師正, 1707 ~ 1769)이다. 심사정의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냈고 그 증조부의 형은 효종의 사위였으니 증조부대에만 해도 심사정의 집안은 명문 사대부 가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 심익창(沈益昌)이 경종 때에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 시해를 도모한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사사되면서 심사정의 집안은 몰락하였다. 심사정은 태어나면서부터 역적 집안의 자손이라는 굴레를 지고 살아야 ..

우리 옛 그림 2022.02.08

나옹애사

이정(李禎, 1578 ~ 1607)은 30세에 요절한 조선 중기의 화원화가이다. 부지런 떠는 삶이 싫었는지 게으를 ‘나(懶)’자를 써서 나옹(懶翁), 나재(懶齋), 나와(懶窩)와 같은 호들을 썼다. 이정은 허균보다 나이가 9살 어렸지만 두 사람은 가깝게 교유했던 사이로 전해진다. 이정이 젊은 나이에 타향에서 객사하자 허균은 라는 글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흔히 로도 불리는 글이다. 사(辭)는 우수와 격정 같은 소재를 아름다운 형식을 빌려 표현하는 서정적 한문 문체이다. 이정(李楨)의 자는 공간(公幹)이며 스스로 나옹(懶翁)이라 호하였다. 아버지 이숭효(李崇孝), 할아버지 배련(陪連), 증조 소불(小佛)이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그가 태어날 때, 한 금신 나한(金身羅漢)이 그의 어머니의 품..

우리 옛 그림 2022.02.03

용 그림

갖가지 좋은 꿈 중에서 그래도 으뜸은 용꿈일 듯하다. 물론 꿈의 내용에 따라 여러 해석을 달리하겠지만 일단 꿈에 용을 보는 것만으로도 웬만하면 기분 좋아지는 꿈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용꿈을 새해가 시작되는 밤에 꾸는 것은 누구나 바랄 일이다. 오늘 용 그림을 많이 들여다보면 혹시 밤에 용꿈을 꿀 수도 있지 않을까? 영조의 총애를 받고 영조로부터 남리(南里)라는 호까지 하사 받은 도화서 화원 김두량(金斗樑)이 그린 는 원본 그림의 종적은 없이 1933년에 촬영된 유리건판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겨져있다. 앉은 채로 낮잠을 즐기고 있는 고사(高士)의 오른편에 하늘로 올라가는 작은 용을 그려 그림 속 인물이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있음을 나타냈다. 그림 속 고사(高士)는 화양건을 쓰고 등에 칼..

우리 옛 그림 2022.01.31

바다 위의 왕양명

마음은 하나인가? 둘인가? 진정한 앎은 내 안에 있는가? 아니면 밖에서 찾아야 하는가? 앎과 실천은 서로 다른가?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 ~ 1528)이 이룩한 신유가(新儒家)철학인 양명학(陽明學)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주희의 주자학과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사람에게는 선을 지향하는 마음과 악을 지향하는 마음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이 중에서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더 근본적이기는 하나 욕망 때문에 가려지기 쉬우므로 수양을 통해 선의 마음을 확충하고 악의 마음을 억제해야 한다고 것이 주희의 견해였지만 왕수인은 사람의 마음에는 본래 선악이 없다고 보았다. 주희가 마음은 기(氣)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의 이치가 이(理)라고 한 것에 대하여 왕수인은 마음이 곧 이(理)이고 이(理)는 곧 기(氣)라는..

우리 옛 그림 2022.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