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236

김홍도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1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명에는 《산수화》 또는 《김홍도필산수도(金弘道筆山水圖)》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에 해당하는 그림 8점이 있다. 조선에도 잘 알려져 있던 중국의 역대 인물들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다. 그림의 크기로 미루어 병풍으로 제작되었다가 해체된 병풍차(屛風次)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취한 뒤에 꽃을 본다’는 뜻의 그림에는 두 인물이 마주 앉은 집의 넓은 창 바깥에 매화나무와 마당에 두 마리의 학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이 매화와 학을 근거로 그림 속 주인공이 북송 때의 시인 임포(林逋, 967 ~ 1028)로 추정되고 있다. 임포는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매화 300본을 심고 학 두 마리를 기르며 20년간 성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

우리 옛 그림 2021.10.16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3

‘횡거영초(橫渠詠蕉)’의 횡거(橫渠)는 북송시대의 철학자 장재(張載, 1020 ~ 1077)의 호이고, 영초(詠蕉)는 ‘파초를 노래하다’의 뜻이다. 장재는 남달리 파초를 사랑했다고 하며 라는 시도 남겼다. 芭蕉心盡展新枝 파초 심이 다하니 새 가지를 펼치고 新卷新心暗已隨 말린 새심의 속잎은 언뜻 벌써 뒤따르네. 願學新心養新德 새 속 배워 새 덕 기르기를 바라고 旋隨新葉起新知 이어 새잎을 따라 새로운 지혜 펼쳐내리. 단순히 파초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파초의 속성에서 덕성을 잘 기르고 새로운 지혜를 배양하는 학문의 요체를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새 속으로 새 덕을 기른다는 것은 덕성을 높이는 공부에 해당하고, 새잎 따라 새 지혜가 펼쳐진다는 것은 학문을 말미암는 공부에 해당한다”는 주석이 있다. 장재는 우주의..

우리 옛 그림 2021.10.13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2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의 고사인물도 8점은 등장 인물을 산수 배경과 자연스럽게 조화시키는 정선(鄭敾) 방식의 고사인물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평을 얻고 있다. 조선시대 고사인물화가 대개 중국 성현과 은자들을 광범하게 포괄하는 양상과 달리 정선이 송(宋)나라 때의 유학자에 국한시켜 그린 점은 이례적이다. 화첩의 고사인물도는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려졌고 화폭의 크기는 세로 30.3㎝, 가로 20.3㎝으로 해악팔경보다는 큰 편이다. 고사인물도들은 모두 송대(宋代) 유학자 8명의 행적이나 시문(詩文)을 화재(畵材)로 삼은 것이다. 첫 번째 은 성리학의 기초를 닦아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에게 학문을 전수한 주돈이(周敦頤, 1017 ~ 1073)에 대한 것이다. 주희(朱熹)가 도학(道..

우리 옛 그림 2021.10.12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1

2020년 7월, 케이옥션 경매에 2013년에 문화재 보물 제1796호로 지정된 겸재 정선의 화첩이 경매품으로 나온 일이 있었다. 화첩의 정식 명칭은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鄭敾筆海嶽八景 宋儒八賢圖 畵帖)》으로, 당시의 경매 추정가는 50억 ~ 70억 원이었다. 이 화첩은 그동안 전 용인대 이사장이 설립한 우학문화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인데, 낙찰이 되었다면 국내 고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는 기록을 세웠겠지만 유찰되고 말았다. 《정선필 해악팔경 및 송유팔현도 화첩 (鄭敾筆海嶽八景 宋儒八賢圖 畵帖)》은 금강산의 진경산수화 8점과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8인의 고사인물화 8점으로 구성된 화첩이다. 화첩의 낙관에 사용된 '정(鄭)'과 '선(敾)'을 각각 따로 새긴 두 개의 백문방인(..

우리 옛 그림 2021.10.11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2

최립이 첫 번에 지은 다섯 수의 시 가운데 마지막은 의 화제다. 偉然而皓者兮 호호백발 노인네들 어쩌면 저리도 비범한고. 乍同而乍異 언뜻 보면 똑같다가 다시 보면 다르구나. 吾方諦視其三人兮 내가 지금 세 사람을 뚫어지게 보노라니 俄若與之爲四 어느새 나를 합쳐 사호(四皓)로 변하는 듯. 최립이 ‘사호(四皓)’라고 한 것은 진(秦)나라 말기에 폭정(暴政)을 피해 상산(商山)에 숨어 살았던 네 명의 노인, 즉 상산사호(商山四皓)를 일컫는 것이다. ‘皓’는 ‘흴 호’자인데 그들의 눈썹과 머리카락이 모두 흰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상산사호는 후세에 나이 많고 덕도 높은 은사(隱士)나 산 속에 은거하는 덕망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에는 화제가 둘이나 적혀있다. 『간이집(簡易集)』에 실린 글에서 최립은 “가..

우리 옛 그림 2021.10.07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1

낙파(駱坡)이경윤(李慶胤, 1545 ~ 1611)은 종실화가이다. 성종의 8남(男)인 익양군(益陽君) 이회(李褱)의 종증손(從曾孫)으로, 종친계(宗親階)에 의하여 정3품 학림정(鶴林正)에 봉해졌지만 따로 벼슬은 하지 않았다. 그런 이경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들은 당대부터 뛰어나다는 평을 받으면서 화명(畵名)을 얻었다. 당대 절파화풍(浙派畵風)의 대가로 꼽히던 김시(金禔)와의 교유를 통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경윤의 그림이 단아하면서 깨끗하고 욕심 없는 담박함이 드러나는 높은 화격(畵格)의 작품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면서, 이경윤이 죽은 뒤에도 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갖고 찾게 만들었다. 아울러 동시대와 그 뒤를 세대의 문사들이 그의 그림에 시와 글을 남겼다. 전하는 ..

우리 옛 그림 2021.10.06

조선시대 비옷

겸재정선미술관이 지난 2019년 11월, 미술관에서 새롭게 소장하게 된 을 공개한 일이 있었다. ‘백납(百納)’은 ‘백가지를 꿰맨다’는 뜻으로, 온갖 종류의 그림들을 모아 만든 병풍이다. 겸재정선미술관에서 공개한 병풍에는 조선과 중국 화가들의 그림 42점이 망라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주목을 받았던 것은 정선의 였다. 사문탈사(寺門脫蓑)는 ‘절 문에서 도롱이를 벗다’의 뜻이다. 는 율곡 이이의 고사(故事)를 그린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고사의 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선의 「경교명승첩」하첩(下帖)의 와 거기에 함께 장첩 되어 있는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의 편지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편지는 이병연이 1741년 겨울에 양천 현령으로 있던 ..

우리 옛 그림 2021.10.02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5

화성행차의 일곱째날인 윤2월 15일은 화성행차를 끝내고 한성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진시(辰時) 정3각(正三刻)인 오전 8시 45분경에 정조는 융복에 말을 타고, 혜경궁은 가교를 타고 거동을 시작하여 중양문(中陽門)을 나와 신풍루를 자나 장안문 밖에 이르렀다. 그 곳에는 문무과 별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꽃모자를 쓴 무동들을 데리고 줄을 서서 왕의 일행을 맞이했다. 정조의 행차는 1772명의 수행원과 말 786필이 따랐으며 행렬의 길이는 1km가 넘었다고 한다. 정조와 혜경궁은 그 날의 숙박지인 시흥행궁을 향하는 도중 사근행궁(肆覲行宮)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근행궁(肆覲行宮)의 위치는 현재의 의왕시 시청별관 앞으로 추정하고 있다. 과천행궁(果川行宮), 시흥행궁(始興行宮), 안양행궁(安養行宮), 안산행궁(安山..

우리 옛 그림 2021.09.28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4

화성 행차의 여섯째 날인 윤2월 14일에는 사미와 궤죽에 이어 양로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신풍루에서 사미와 궤죽 행사를 지켜보던 정조는 행좌승지 이만수에게 "오늘 양로연을 베풀려고 하는 것은 노인을 존경하기 위함이니, 여러 노인들로 하여금 밖에서 오래 지체하여 기다리게 할 수 없다. 내가 곧 낙남헌에 갈 것이니 경은 이곳에 남아 있다가 사민 중에 와서 기다리는 자에게 일일이 죽을 먹이고 혹시 나중에 와서 제시간에 오지 못한 자가 있더라도 일체 차가운 죽을 먹이지 말고 직접 챙겨서 혹시라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는 지시를 내렸다. 오전 8시 15분경에 삼엄(三嚴)을 알리는 북이 울리고 정조가 융복(戎服)을 갖추어 입고 양로연이 열리는 낙남헌에 나와 자리에 올랐다. ▶삼엄(三嚴) : 엄(嚴)은 임금의 거..

우리 옛 그림 2021.09.27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3

화성 행차 5일차인 윤2월 13일 오전, 화성 행궁의 봉수당(奉壽堂)에서 화성행차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열렸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정조가 혜경궁의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은 것이다. 잔치는 진정(辰正) 3각(오전 8시 45분경)에 시작되었다. 회갑잔치에 초청된 사람들은 혜경궁의 두 딸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를 포함한 내빈(內賓) 열 세 명과 외빈(外賓) 예순 아홉 명이었다. 여기서 내빈은 홍씨 집안의 아내와 딸들을 가리키고 외빈은 8촌 이내 동성친족의 남자를 가리킨다. 회갑잔치는 전통적인 왕실 예법에 따라 진행되었다. 잔치는 혜경궁이 내합에서 봉수당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 취위(就位) - 혜경궁에..

우리 옛 그림 2021.09.26